2015년 12월 14일 월요일

광장에서 시장으로

민주주의는 아고라 ,곧 광장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형식이다. 아고라는 폴리스의 다른 두 영역인 에클레시아와 오이코스를 연결하고 동시에 분리하는 매개 공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에서 오이코스는 가족공간을 의미하며, 그 안에서 사적 이익이 형성되고 추구되는 장소를 말한다. 반면 에클레시아는 '공적' 공간을 의미하며, 선출이나 지명, 또는 추첨에 의해 정해진 정무관으로 구성된 민회를 뜻한다. 그 기능은 폴리스의 모든 시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동의 관심사인 전쟁과 평화, 국토 방어, 그리고 도시 국가에 속한 시민의 공동생활을 지배하는 규칙 같은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에클레시아의 어원은 '부르다' ' 소집하다' '모으다'라는 의미의 동사 kalein으로 이 개념은 처음부터 아고라의 존재를 상정했다. 아고라는 모여서 이야기하는 곳 ,시민과 민회가 만나는 곳으로, 민주주의의 장소였다.

(...)그러므로 한 정치 체제의 민주주의적 성숙도는 이러한 번역의 성공과 실패, 매끄러움과 거칢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즉 그 주된 목적을 달성한 정도에 의해 측정되어야지, 종종 민주주의(모든 민주주의, 민주주의 자체)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오인되곤 하는 이러저러한 절차의 완고한 준수 여부에 의해 측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단 대중 투표가 통치자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유일하게 수용 가능한 지표가 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간접 참여의 효율은 종종 논쟁거리가 되곤 했다. 공연한 반대나 공개 토론을 용인하지 않는 명백한 권위주의적, 전체적, 전체주의적, 폭압적 체제가 의사 표현의 자유를 신중하게 존중하고 보호하는 체제보다 더 높은 투표율(따라서 형식적 기준에 따르면, 통치자의 정책에 대한 더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 후자의 체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투표율을 쉽사리 자랑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가 출연하는 초기단계, 이른바 자본의 ' 원시 축적'단계는 심각한 분노를 표출하는 미증유의 사회 격변, 생계 수단의 강탈, 그리고 생활 조건의 양극화 같은 특징을 예외없이 드러낸다는 점을 기억하자. 이러한 특징들은 그 희생자들에게 충격을 주면서 폭발의 잠재력을 내포한 사회적 긴장을 창출할 수밖에 없으며, 신흥 사업가와 상인은 강력하고 무자비하고 위압적인 독재 체제를 등에 업고 이러한 긴장을 억눌러야 한다. 그리고 전후 일본과 독일의 '경제 기적'에서 상당 부분은, 토착 정치 기관으로부터 국가 권력의 강제/ 억압 기능은 넘겨받은 반면 피점령국의 민주주의 제도에 의한 통제는 효과적으로 회피한 외국 점령군의 존재 덕분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을 첨언한다.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민주적 권리의 형식적 보편성과 권리 보유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의 비보편성 사이의 모순은 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악명 높은 약점 가운데 하나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법률상의 시민'의 법적 조건과 '사실상의 시민'의 실제 역량을 나누는 간격, 개인이 자기 기술과 자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이러한 기술과 자원이 없다)을 동원해서 매울 것으로 기대되는 간격이다.
(...)선택의 자유는 결국 계산할 수 없는 무수한 실패의 위험을 수반하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능력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빠져 이러한 위험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더 많은 이들은, 실패의 두려움이 공동체의 이름으로 발급된 보험 증권(개인적 실패나 불의의 재난에 처했을 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증권)에 의해 완화되지 않는 한, 선택의 자유라는 자유주의의 이상을 형체 없는 유령이나 헛된 꿈으로 여길 것이다.

만약 민주적 권리와, 그 권리에 수반하는 자유가 이론상으로는 부여되지만 실제로는 획득될 수 없다면, 절망의 고통보다는 불운의 수모가 확실히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나날이 시험받는 , 삶의 도전에 대처하는 능력은 결국 개개인의 자신감과 자부심을 투사하거나 용해하는 작업장이다. 사회 국가가 아닌 정치 국가, 사회 국가가 되기를 거부하는 정치 국가에서는 개인적 나태와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다. 만인을 위한 사회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마 갈수록 많은 사람이 자신의 정치권이 쓸모없거나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정치권이 사회권을 제자리에 놓이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사회권은 정치권을 '현실적인' 존재로 자리 잡고 계속 작동하게 하는 데 불가결한 것이다. 정치권과 사회권은 자기 존속을 위해 상대방을 필요로 하며, 이러한 존속은 공동의 성취일 수 밖에 없다.
 *사회국가라는 명칭은 강조의 초점을 물질적 이득의 분배에서, 물질적 이득의 제공을 통해 공동체 건설을 추진한다는 동기로 이동시킨다.

(...)

약 60년 전 T.H 마셜은 당시 유행하던 사조를 재구성해서 시간을 초월한 인류 진보의 보편 법칙을 자신 있게 내놓았다. 그것은 재산권에서 정치권으로, 그다음 사회권으로 나아가는 진보였다. 그가 볼 때 정치적 자유는 경제적 자유의 불가피한 , 심지어 다소 지연된 산물이었다. 한편 정치적 자유는 필연적으로 사회권을 낳았고, 그에 따라 두가지 자유를 모든 사람이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마셜은 정치권이 잇달아 확대되는 데 발맞추어, 아고라는 수용 인원을 더 늘리고 이전에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부류의 사람들에게 차츰차츰 발언권이 주어지고 불평등이 점점 줄어들고 차별이 갈수록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약 25년 후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마셜의 예측을 대놓고 반박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수정해야 할 또 다른 규칙성을 포착했다. 즉 사회권의 보편화가 결실을 거두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많은 정치권 보유자들이 개인적 이익을 위한 안건을 지지하는 데 투표권을 행사하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 소득이나 생활 수준, 삶의 전망에 관한 불평등이 줄어들거나 없어지기는커녕 더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갤브레이스는 이러한 추세가 새롭게 등장한 '만족하는 다수파'
가 드러내는 이전과 확실히 다른 풍조와 인생철학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위험이 큰 반면 기회도 풍부한 세계에서 확고히 주류의 자리를 차지한 신흥 다수파는 '복지 국가'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복지 국가는 안전망이기보다는 감옥이었고, 기회이기보다는 제약이었다. 또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전 세계를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는 그들의 입장에서 복지 국가는 결코 필요할 리도 없고 이득을 볼 성싶지도 않은 낭비에 불과했다. 그들이 보기에 한자리에 붙박인 일국의 빈민은 더는 '노동 예비군'(현역으로 다시 동원될 때를 대비해 예비군의 전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고, 빈민층을 돕는 데 돈을 쓰는 것은 낭비에 불과했다. 마셜이 '인권의 역사적 논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할 지점으로 생각한 사회 국가에 대한 '좌우를 넘어선' 광범위한 지지는 점점 더 빠르게 줄어들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복지 국가에 대한 재정 지원이 부족해지고 붕괴되며, 심지어 적극적으로 폐지되는 것은 자본주의 이윤의 원천이 공장 노동자의 착취에서 소비자의 착취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또한 소비 시장의 유혹에 대응하는 데 필요한 자원이 없는 빈민에게는, 소비 자본의 관점에서 본'유용함'을 증명하는 현금과 신용 계좌('복지국가'가 제공하는 종류의 서비스가 아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복지국가는 오늘날의 '사류화(私類化)' 조류( 소비 시장의 본질적으로 반공동체적이고 개인화된 생활 유형, 사람들을 타인과의 경쟁에 몰아넣는 생활 유형)를 꼭 집어 방지하기 위해 고안되고 장려된 듯한 기획이었다. 사유화 조류는 사람들 사이 유대의 그물을 약화시키고 붕괴시킴으로써 인적 연대의 사회적 기초를 잠식하는 것이었다. '사유화'는 사회적으로 생산된 문제들에 맞서 싸워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벅찬 과제를,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목적에 맞는 자원이 부족한 개인들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반면 사회 국가는 무자비하고 부도덕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에서 희생자를 내지 않기 위해 구성원들을 단결시키는 성향을 띤다.

(...)

그렇지만 지금 우리(세계 시장, 국제 통화 기금, 세계은행의 일치된 압력을 받는' 개발 도상국'의 '우리'뿐 아니라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선진국'의 '우리')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현실적인 것이든 상상된 것이든 '총체성'과 사회와 공동체는 점차 '공허하게' 되어 간다. 개인적 자율성의 범위는 확대되고 있지만, 동시에 과거에는 국가의 책임으로 여겨졌던 기능이 지금은 개인적 고려 사항으로 ('자회사'로 분할되듯이) 이전되었다. 국가는 단체 보험 증서에 대한 보증에 열의가 없으며 갈수록 많은 유보 조항을 달게 되고 , 안전한 복지의 추구는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

(...)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길이와 밀도가 급속히 늘어나는 '정보 고속 도로'의 네트워크 덕분에, 모든 개인은 자기 몫을 모든 다른 개인, 특히 공적 우상(텔레비전과 타블로이드 신문, 그리고 대중 잡지 전면에 등장하여 끊임없이 각광을 받는 유명 인사들)의 몫과 비교하라는, 그리고 삶의 가치를 겉으로 드러나는 부에 의해 측정하라는 권유와 유혹과 설득, 더 나아가 강제를 받게 된다. 이와 동시에 만족스러운 삶의 현실적 전망은 급격히 분산되지만 , 사람들이 꿈꾸고 갈망하는 '행복한 삶'의 기준과 증표는 수렴되는 경향을 띤다. 사람들이 행동하는 원동력은 이제 '옆 사람을 따라잡는다'라는 어느 정도의 현실적 욕구가 아니라 '유명 인사를 따라잡는다.' 즉 슈퍼모델, 프리미어리그 축구 선수, 상위 10대 가수를 따라잡는다는 지독하게 허구적인 생각이다. 올리버 제임스의 말대로, 이런 유해한 심리는 "비현실적인 열망, 그리고 그것이 충족될 수 있다는 기대"를 조장한 탓에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수의 영국인은 자신이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으며","1970년대 이후 실현 가능성이 줄어들었음에도 누구든 앨런 슈거나 빌 게이츠가 될 수 있다고 믿고"있다.
오늘날의 국가가 국민에게 실존적 안전("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즉 루스벨트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는 '굳건한 신념'을 피력하며 사용한 문구)을 약속할 수 잇는 가능성과 의지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부수적 피해/지그문트 바우먼/정일준 옮김/2011/민음사














2015년 6월 18일 목요일

집착의 경

1.이와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2. 그 때 싸밧티 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즐기면서 탐내고 그것에 묶여서 정신을 잃고 애책하여 취한 상태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 속에서 지냈다.
3.많은 수행승들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싸밧티 시에 탁발하러 들어갔다. 싸밧티 시에서 탁발하여 식사를 마친 뒤, 탁발에서 돌아와 세존께서 계신 곳을 찾아왔다.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한쪽으로 물러나 앉아서 그 수행승들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여기 싸밧티 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즐기면서 탐내고 그것에 묶여서 정신을 잃고 애착하여 취한 상태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4.그러자 세존께서는 그 뜻을 헤아려, 때맞춰 이와 같은 감흥어린 시구를 읊었다.

"욕망에 집착하는 자들은
욕망에 의한 염착에 묶여
결박들 속에서 잘못을 보지 못하니
분명히 결박의 염착에 사로잡혀
광대하고 커다란 거센 흐름을 건너지 못하리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2.그 때 싸밧티 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집착하여 즐기면서 탐내고 그것에 묶여서 정신을 잃고 애착하여 눈이 멀고 취한 상태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 속에서 지냈다.
3. 한 때 세존께서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싸밧티 시에 탁발하러 들어갔다. 마침 세존께서는 싸밧티 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집착하여 즐기면서 탐내고 그것에 묶여서 정신을 잃고 애착하여 눈이 멀고 취한 상태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 속에서 지내는 것을 보았다.
4. 그러자 세존께서는 그 뜻을 헤아려, 때맞춰 이와 같은 감흥어린 시구를 읊었다.
[세존]
"어망의 입구에 있는 물고기처럼
 욕망에 눈멀고 그물에 덮여
 갈애의 덮개로 갇히고 방일의 친척에 묶여
 젖먹이 송아지가 어미를 향하듯,
 사람들은 늙음과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우다나-감흥어린 시구/전재성 역주/ 2009/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15년 6월 8일 월요일

부자연스러움

편견을 조장하는 자들은 게이 성교가 아이를 낳을 수 없기 때문에 - 이것은 생식이 아니라 즐거움을 위한 성교이다- 부자연스럽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대체 무엇인가? 조리된 음식을 먹고 만들어진 옷을 입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으며 , 텔레비전을 보거나 전기 조명기구를 사용하는 것도 '자연스럽지'않다. 피임을 하는 것도 '자연스럽지'않다. 그렇지만 안심할 수 있는 피임은 대다수 이성애자들에게 성적 즐거움을 위해 필수적이다. 만약 즐거움을 위한 성교가 자연스럽지 않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피임을 하는 사람들- 세계 인구의 절대 다수인- 도 역시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게이 성교가 부자연스럽다는 말은 분명 잘못됐다. 즐거움을 위한 성교도 생식을 위한 성교처럼 '자연스럽고' 정당하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특정 형태의 사회질서를 강제하는 데 이해관계를 갖는 지배자들만이 게이 성교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
인류 역사상 여러 형태의 사회가 있었지만 오늘날처럼 동성애 행위를 억압한 적은 없었다.
(....)
인간의 성 취향은 너무 다양하고 복잡해서 우리의 지배자들이 좋아하듯이 '동성애'와 '이성애'라는 두 개의 산뜻한 범주로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
첫째, 과학적인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전혀 엉뚱한 결과를 야기해 오히려 반동적인 사상을 강화시킬 수 있다. 설사 흑인이나 여성처럼 게이도 생물학적으로 결정됐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가능하다 해도 그렇다 해서 게이억압이 끝장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과 흑인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됐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서 여전히 잔인하게 억압당한다.
사회는 우리에게 단지 두 범주 만을 제시하며 (...) 우리의 삶을 실제로 어떻게 영위할 것인지를 생각하거나 말할 기회도 없다.
(...)

Socialists and Gay liberation /Colin wilson / 정민 옮김 /1998/연구사

소비자 만들기

요새 모든 당파의 정치인들은 한 목소리로 절실하게 '소비자 주도의 경기회복'을 말한다. 생산 감소, 주문 감소, 중심 상업지구의 불황은 모두 소비자의 관심 또는 '소비자의 신뢰'(다시 말해 파산에 대한 두려움을 억누를 만큼 강력한 소비자의 신용 구매 욕망)가 부족한 탓으로 몰아가곤 한다. 이 모든 문제가 일소되리라는 , 경기가 활력을 되찾으리라는 희망은 소비자들이 다시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책임으로 돌아간다. 소비자들은 다시 ㄱ구매하려고 하고, 많이 사려고 하고, 더 많이 사려고 해야한다. 상황이 정상적이고 제대로 돌아감을 확인하는 주요 근대적 잣대이자 사회가 계획대로 작동함을 알려 주는 주요 지표인 '경제 성장'은 소비자 사회에서 '국가의 생산력' (건강하고 풍부한 노동력, 넉넉한 재원, 자본가들과 경영자들의 대담한 기업가 정신)이 아니라 그 소비자들의 열망과 활력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날 개인의 동기와 사회통합, 그리고 체제 재생산을 연결시키던 노동이 수행했던 역할이 이제는 소비자의 활동에 맡겨졌다.
'전근대'-사람들에게' 자기 신분을 지키고' 태어날 때 결정된 그 '사회적 범주'의 생활수준에 맞춰살라(그러나 그걸 넘어서지 말라)는 비교적 간단한 과제를 지우는 , 전통적이고 귀속적 ascriptive인 사회적 배치 구조-가 해체되면서, 근대는 개인에게 '자기 건설'의 의무를 지웠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 적어도 그 기초부터 차근차근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건설하라는 것이다. 개인의 책임- 지난 날에는 귀족이 무언지, 상인이 무언지, 용병, 장인, 소작농, 농장노동자가 뭔지 명확하게 정의해 놓았던 질서를 따르는 것이었지만-은 이제 사회적 정의 자체를 선택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승인받는데 까지 연장되었다.








새로운 빈곤/지그문트 바우만/이수영 옮김/ 2004/ 천지인

사람들을 일하게 만들기

존 스튜어트 밀은 '우리는 노동계급 일반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만족스런 임금을 받아 가겠다는 자긍심을 찾아볼 수가 없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이 하는 유일한 노력이란 되도록 많이 받고 일로서는 되도록 적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라고 불평했다. 그는 사실 장인에서 노동자로의 변천이 시장의 냉정한 비용-효율 논리로 지나치게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애석해한 것이다. 근대 이전 제작본능(workmanship instinct,인간은 낭비를 싫어하고 생산적인 일을 하려는 본능이 있다는 것) 의 마지막 자취마저 너무도 빨리 사라지고 있음을 . 역설적이게도 , 노동윤리에 호소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공장노동자를 시장논리의 지배로부터 면제시키려던 지난날의 흐름을 은폐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장논리는 노동자들의 성실한 태도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동윤리로 위장한 규율이 권장되었다. 자긍심이나 명예, 의미나 목표따위는 잊어라. 날마다, 한 시간 한 시간을 온힘을 다해 일하라. 노력해야 할 이유를 전혀 모르겠더라도, 노력의 의미를 알 수가 없더라도.
근대화의 개척자들이 맞닥뜨렸던 진정한 문제는, 노동의 목표를 정하고 그 과정을 스스로 제어하면서 자신들이 하는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익숙해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이었다. 그 사람들은 이제 타인이 정하고 감독하는 , 따라서 그 일을 하는 자신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작업에 자신들의 기술과 노동 능력을 사용하도록 바뀌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맹목적인 훈련을 통해 노동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복종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훌륭한 작업 결과에 대해서도 긍지를 갖지 않고, 자신들에게 의미가 사라진 일을 해내야 했다.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가 말했듯이., 새 공장제도는 부분적인 인간을 필요로 했다. 복잡한 기계장치를 구성하는 영혼 없는 작은 부품들'을 상대로 치러졌다. 생산적인 노력과 무관하고, 생산에 배치된 부품들과 불필요하게 마찰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흥미와 욕망을 상대로, 근본적으로 노동윤리는 자유의 포기와 관련된 것이었다.

(...)

올바르고 고상한 품행을 가르치는 다른 윤리적 가르침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윤리는 과거 청산 작업의 건설적 전망이자 처방이었다. 그것은 윤리적 성전의 대상에 해당하는 이들이 지닌 습관과 기호, 또는 욕망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노동윤리는 올바른 행위 형태를 그려냈을 뿐 아니라 윤리 교육의 대상자들이 교육을 받지 않은 채 해 왔을 모든 것들에 의혹을 던졌다. 사람들의 경향은 내버려둘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멋대로 행동하게 하고 그들의 변덕과 기호에 내맡겨 둔다면, 그들은 노력도 하기 전에 굶어죽고, 발전을 고민하기보다 방탕에 빠지게 될 것이며, 멀리 있지만 안정적인 행복보다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유희를 우위에 둘 것이고, 한마디로 말해서 일하기 보다 아무것도 안 하기를 좋아하게 될것이었다. 이 모든 병적이고 방치된 욕구들은 신흥 산업이 맞서 싸우고 결국은 종식시켜야 할 '인습traditon'의 일부였다. 막스 베버가 지적했듯이, 노동윤리는 지나간 현실을 반추하면서'평범한 노동자들의 인습주의'를 '공격하다시피 했다'. 평범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욕구에 대한 고정적인 생각을 떨치지 못해서 여가를 더 좋아하고, 더 열심히 또는 더 오래 일하여 수입을 늘릴 기회를 무시하는 인습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인습주의는 '비난받았다.' 근대라는 아름다운 신세계를 개척하는 이들에게 '인습'이란 물론 모욕이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추잡하고 비난할 만한 경향을 뜻하는 것으로 노동윤리는 그에 맞서 싸워야 했다. 사람들은 어제 손에 넣은 것을 갖고 오늘 만족하려 했고, 일을 더 해야(사실은 비정하고 당혹스러우며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제도와 그 성전에 굴복해야)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더 많은 것'을 피하고 더 좋은 것을 무시하는 습성이 있었다. 노동윤리가 산업사회 이전의 '인습'을 상대로 선포한 전쟁에서 공식적으로 지명된 적들은 표면적으로는 인간적 욕구의 소박함과 인간적 갈망의 평범함이었다. 그러나 실제 전투- 가장 흉포하고 무자비한 싸움-는장래 공장 노동자들의 저항을 상대로 치러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라지도 않았고 이해하지도 못한, 그리고 대부분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지 않았을 노동 방식의 불편함과 당혹스러움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빈곤/지그문트 바우만/이수영 옮김/ 2004/ 천지인

2015년 6월 7일 일요일

노동윤리가 최하층계급을 낳다

'최하층계급'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건 군나르 뮈르달 Gunnar Myrdal이었다. 1963년에, 그는 나날이 수많은 이들을 영구히 실직자로 만드는 탈산업화의 위험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말을 사용했다. 실직의 이유는 실업자가 된 이들의 무능력이나 도덕적 결함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일자리가 필요하고 일자리를 바라는 모든 이들에게 돌아갈 일자리 부족 탓이었다. 노동윤리의 설교가 실패한 결과가 아니라, 사회가 노동윤리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삶을 뒷받침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뮈르달의 견해로는. 최하층계급의 구성원들은 배제의 희생양이었다. 그들이 새로 얻은 지위는 스스로 택한 결과가 아니었다. 배제는 경제 논리의 산물이고, 배제가 정해진 이들에겐 어떤 힘도 영향력도 없기 때문이다.
최하층계급이라는 개념이 대중의 관심 속으로 들어간 건 훨씬 나중인, 1977년 8월 29일, [타임]지의 커버스토리를 통해서였다. 커버스토리는 '거의 모든 이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통제하기 어렵고, 사회적으로 이질적이며 해로운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 그들은 가까이 할 수 없는 이들, 미국의 최하층계급이다'라고 매우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이 정의의 뒤로 긴 목록이 이어졌다. 비행청소년, 학교 중퇴자, 약물중독자, 복지 수급자인 편모, 도둑, 방화범, 폭력범, 미혼모, 기둥서방, 마약밀매상, 거지. 이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두려워하는 대상들로서 , 평범한 이들의 양심에 큰 부담을 지운다.
'통제하기 어렵고', 이질적이고,해로운, 따라서 가까이 할 수 없는 이들,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봤자 소용이 없다. 그 손은 그저 허공에 머물 테니. 이들은 구제할 길이 없었다. 그들을 구제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병든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가까이할 수 없다는 건 노동윤리가 이를 수 없다는 걸 뜻했다. 훈계, 감언, 양심을 건드리는 호소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모든 것에서부터 자발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벽을 뚫지 못했다. 이것은 단순히 노동을 거부하는 문제이거나 무위도식하고 기생하는 삶을 더 좋아하는 문제가 아니라, 노동윤리가 상징하는 모든 것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의 문제였다.
켄 올레타Ken Auletta는 1981~2에 꾸준히 '최하층계급'의 세계를 탐구하여 [뉴요커]에 보도했고, 그 뒤에는 책으로 펴내어 널리 읽히고 큰 영향을 미쳤다. 그를 자극한 건, 그 자신의 양심과 그의 동료 시민들 대부분이 느끼는 근심이었다.

나는 궁금했다. 대부분의 미국 도시를 괴롭히고 있는 범죄, 생활보호, 마약통계의 급증, 그리고 반사회적 행동의 너무도 명백한 증가 뒤에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나는 매우 뚜렷한 최하층 계급이 존재한다는 데에 가난한 학생들이 거의 이견을 보이지 않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 최하층계급이 일반적으로 사회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 평범하게 받아들여지는 가치들을 거부하며, 소득 문제뿐 아니라 행동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도, 그들은 가난하기만 한게 아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그들의 행동은 비정상으로 보인다.

최하층계급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유지시키는 담론이 쓰는 어휘, 문장, 수사법에 눈을 돌려 보자. 올레타의 문맥은 아마 그것을 살펴볼 가장 좋은 자료이리라. 그의 계승자들은 대부분 그보다 덜 양심적이었지만, 올레타는 그들과 달리 그저 '최하층계급을 비난'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는 조금 거리를 두고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이야기에 등장하는 부정적 주인공들을 비난 하는 만큼 동정한다.

새로운 빈곤/지그문트 바우만/이수영 옮김/ 2004/ 천지인

2015년 6월 4일 목요일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고 결정하는 방법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에 관심이 많다.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네 가지 기능인 직관- 사고 -느낌- 감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고 말한다. 네 가지 기능 중 어느 한 가지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를 판매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직관적인 사람
직관을 이용해 제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제품의 발전 가능성에 비중을 둔다. 세세한 부분을 따지기보다는 전체적인 윤곽을 살피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차세대 제품으로 차별화를 노리는 게 유리하다. 애드빌이 새로운 이부프로펜을 선보이면서 '통증을 없애 줄 차세대 약'으로 선전한 것은, 직관을 이용한 소비자들을 상대로 완벽한 차별화 제품을 내놓은 것이었다.
지고간은 장차 일어날 가능성에 흥미를 느낀다. 따라서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제품을 선보일 때 직관에 호소하여 제품을 판매하면 매우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
생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분석적이고 꼼꼼하며 논리적이다. 그들은 많은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하기 좋아하나 상황에서 얻는 감상적 면은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쌀쌀맞고 냉정해 보일 수도 있지만 무조건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생각이 많을 따름이다. 헨리 키신저 타입이라고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사람들은 제품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잘 받아들인다. BMW가 내놓은 '최고의 주행 기계'라는 차별화 전략은 아마도 이들 유형의 사람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특히 BMW 의 환경 공학적 디자인, 기동성, 적정 무게의 엔진, 여러 전문가들의 호평 등은 영향력을 더욱 가중시킬 것이다.

감성적인 사람
느낌을 이용해 제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느낌에 관심이 많다. 그들은 분석을 싫어하며 느낌에 따라 행동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행동하길 즐기며 단골 제품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믿음직한 전문가의 추천이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한다. '전문가들이 선택한 제품'이라는 미라클글로의 차별화 전략이야말로 느낌에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잘 들어맞는다. 선해보이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꽃에 둘러싸여 미라클글로의 제품을 칭찬하는 그들의 광고는 완벽한 전략의 결과다.

감각적인 사람
감각을 이용해 제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사실적인 시각으로 제품을 관찰한다. 그들은 세부적인 것에 상당한 집착을 보이며 꼼꼼하게 따져보기 때문에 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들의 상황의 앞뒤 관계를 따지는 데 능숙하다
선두 전략을 내세운 렌터카 업체 허츠의 차별화 전략인 ' 그 어디에도 허츠와 같은 곳은 없다'는 감각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훌륭한 전략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허츠가 가장 좋은 회사라 여기게 된다. 25년간 들었던 허츠가 최고라는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들에게 허츠가 최고라는 사실은 상식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사람들이 이따금 이런 기능을 혼합하여 사용한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것이다. '직관'과 '느낌'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세부적인 것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사고'와 '감각'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를 활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 한 가지 이상의 기능을 동원하여 어떤 제품을 살지 결정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잭 트라우트의 차별화 마케팅/ 잭트라우트-스티브 리브킨 지음 / 이정은 옮김/2011/더난출판

2015년 6월 1일 월요일

브랜드

브랜드란 마음속에서 하나의 카테고리를 차지하는 단어입니다.코카콜라는 소비자의 마음속에서 '콜라'라는 카테고리를 차지한 하나의 단어죠

-구글은 '검색'이라는 카테고리를 차지했습니다.
-레드불은 '에너지드링크'라는 카테고리를 차지했습니다.

카테고리는 브랜드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새로운 카테고리를 창출해내거나 원래 속해 있던 카테고리로부터 기존브랜드를 몰아내지 못한다면 새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창출할 수 없습니다.

마케팅이란 브랜드 전쟁이라기보다는 카테고리 전쟁에 가깝습니다. 만약 당신의 브랜드가 새 카테고리 내에서 최초의 브랜드라면 , 당신의 브랜드는 앞으로 수십 년 간 해당 카테고리 내에서 지배적인 브랜드로 군림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단지 '브랜드'가 아니라 '카테고리'를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새 카테고리에는 새 이름을
모든 새 카테고리는 새 브랜드를 만들 기회를 열어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기업은 그 새 카테고리를 커버하기 위해 기존 브랜드를 확장 한다. 이것이 바로 마케팅에서 가장 큰 실수다.



브랜드 론칭 불변의 법칙 / 알 리스 & 로라리스/ 배현옮김 /2013(2004)/비즈니스맵

2015년 5월 17일 일요일

손자병법

이익을 주어 유인하라, 성나게 하여 동요시켜라
어지럽게 하여 이득을 취하라, 편하면 고생스럽게 만들라
방비가 없는 곳을 공격하라, 알아차리지 못할 때 손을 써라
상대방은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되 나의 모습은 감추어라
그러면 너는 적의 운명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백전백승하는 자는 가장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자가 가장 잘하는 사람이다.
성을 공략하는 것은 최고의 방법이 아니며
이는 부득이한 경우에만 사용해야 한다.

규칙이 불분명하고 명령이 명확하지 않으면 이는 사령관의 잘못이다
명령이 명확함에도 이를 이행하지 않을 때는 관리의 잘못이다.

허영심을 내세우지 않는 자는 하늘이 돕고,
재난을 이겨낸 자는 사람들이 돕고,
겸손한 자는 땅이 돕는다 했습니다.

새가 잡히면 명궁도 버림을 받는다. 꾀 많은 산토끼가 잡히면 사냥개는 탕湯이 된다. 야망과 욕심으로 가득 찬 월왕은 난세에는 좋은 반려자이나. 평안한 시대에는 같이할 인물이 아니다. 친구여 자네도 떠나는 것이 좋겠네

하루의 승리가 수년의 적의를 낳는다. 그러한 장군들은 지휘관의 자격이 없으며 군주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결국 진정한 승리를 얻지 못한다.

세금을 부당하게 징수하고, 부가 편중되고, 과도하게 군사력을 계속 키우는 나라는 아니다. 도에 넘치게 부유하고, 군주는 너무 거만하고, 장군들은 큰소리만 치고, 그러면서도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기만을 바라는 나라는 가장 먼저 멸망할 것이다.



2015년 5월 4일 월요일

1953년도 리스트 아카데미 종업식- 코다이

1953년도 리스트 아카데미 종업식
학생여러분!
방학을 맞이하는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두 세 달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정원사가 두 달 동안 정원을 돌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가 좋은 음악가일까요?
백년 전에 슈만은 이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 글을 여러가지 번역판이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학생들이 읽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책은 도서관에서 단 한 번 빌려졌을 뿐입니다.

지금의 똑똑한 학생들조차 최신시설의 도서관이 주는 편리함을 이용하지 않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제가 말하려고 하는 대상은 음악학자가 아니라 진실로 음악가가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읽을 가치가 있는 몇 권의 책에 대해서입니다.
이것들 중 하나가 바로 슈만의 글입니다.

무엇보다도 귀를 훈련시켜야합니다. 
종소리,유리소리,새소리,자동차소리에도 음을 찾아보십시요
절대음감이라는 신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훈련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가 ‘라’라고 하는 A음도 국제회의를 통해 결정되기 전까지는 지역마다 달랐었습니다.
음악은 손가락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기 없이도 속으로 음악을 부를 줄 알아야 합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피아노를 2년동안 공부해 온 한 어린소녀가 3주 가까이 모짜르트를 연습해 왔습니다.
레슨시간에 늦게 도착한 이 아이는 ‘선생님 지금 치고 계신 곡이 뭐에요?’라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놀라서 대답했습니다.

‘네가 오늘 레슨 받을려고 연습한 곡 아니냐?’

왜 이아이는 자기가 연습해 온 곡을 몰랐을까요?
그 이유는 선생님이 전혀 틀리지 않고 연주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음악교육 결과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 그러면 누가 좋은 음악가일까요?

만약 당신이 특별히 어떤곡에 자신이 없다거나 연주가 끝날때까지
그 속에 빠져있을 수 없다면 좋은 음악가가 아닙니다.
우연히 악보가 두 장이 넘어갔을 때 연주를 멈춰야 된다면 그 사람도 좋은 음악가는 아닙니다.

좋은 음악가란 처음 보는 악보를 접했을때 그 속에서 뭔가를 꺼낼 수 있고
아는 것을 보고도 그 다음에 무엇이 나올지를 예상한다면 좋은 음악가입니다.
다시말해 음악이 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에 있는 사람이 좋은 음악가인 것입니다.
귀로 음악을 듣고 빠르게 해석을 내릴 수 있는 재능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타고난 재능은 훈련을 통해서만 발전될 수 있습니다.

산 속에 숨어 지내면서 연습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음악가가 될 수 없습니다.
오케스트라나 앙상블, 합창단과 가까이 하면 훌륭한 음악적 경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어떤 음악을 좋아할지 쉽게 결정하지 마십시오.
점점 나이가 들면서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음악이 많습니다.

다른 예술분야와 과학, 인생, 모든분야를 깊이 공부하십시오.
삶이 없이는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예술 없이도 삶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도덕이나 예술은 그 법칙이 같습니다.
위대한 예술가가 된다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음악가의 최고의 경지는 아무리 복잡한 악보를 보면서도 듣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고 상상해 내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내적인 귀를 발전시킵니다.

어른들은 빨리 빨리 발전하기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것보다 슈만의 충고가 더 필요합니다.
잘 훈련된 귀, 잘 훈련된 마음, 잘 훈련된 지식, 잘 훈련된 손
이 네가지 중에 한가지라도 뒤처지거나 앞서간다면 뭔가 잘못되고 있는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까지 마지막 것, 잘 훈련된 손에만 집중해왔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을 뒤처지게 만들었습니다.

잘 훈련된 지식은 어느 학교의 음악 커리큘럼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음악들의 약점은 모두 그곳에서 드러났습니다.
우리에겐 합창단이 없었기 때문에 과거 명곡들을 연주하는 경험을 이제서야 얻게되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현악4중주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탁월한 음악을 듣는 가치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소수의 학생만이 슈베르트의 현악4중주를 다 연주했을 뿐입니다.

자, 그럼 이런 길고 지루한 공부를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요?

경쟁에서 이기기위해? 주위사람들의 칭찬? 명성?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기위해 자신의 재능을 최고 수준까지 갈고 닦는것이
재능을 받은 사람들이 갚아야 할 책임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가치있는 존재인가는 그가 사람들에게 또 자기민족, 자기나라를 위해
세상을 위해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가에 있습니다.

진정한 예술은 그것을 이루는 강렬한 힘 중에 하나이며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을 접할 수 있도록 갚아주는 사람이 인류에 대한 예술가의 의무를 다하는 자입니다.
완벽한 음악가는 없습니다. 
하지만 완벽을 목표로 계속 노력하면 그 거리를 좁힐 수 있고 적어도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아직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슈만의 이 말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배움에는 끝이없다!”

2015년 4월 27일 월요일

위대한 축복의 경

4. 어리석은 사람을 사귀지 않으며, 슬기로운 사람에 가까이 지내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5.분수에 맞는 곳에서 살고, 일찍이 공덕을쌓아서 스스로 바른 서원을 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6.많이 배우고 익히며 절제하고 훈련하여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7.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고,일을 함에 혼란스럽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8.나누어주고 정의롭게 살고, 친지를 보호하며, 비난받지 않는 행동을 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9.악함을 싫어하여 멀리하고, 술 마시는 것을 절제하고,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10.존경하는 것과 겸손한 것, 만족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때에 맞추어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11.인내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숫타니파타/전재성 역주/ 2004/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부끄러움의 경

1.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을 어기고 싫어해서 '나는 당신의 친구다'라고 말하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도맡아 도와주지 않는 사람, 그는 나의 친구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2.친구들에게 실천 없이 사랑스런 말만 앞세운다면, 현명한 자들은 그를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는 자로 알아야 합니다.
3.항상 전전긍긍하며, 금이 갈까 염려하면서도 벗의 결점만을 보는 사람은 친구가 아닙니다.아들이 아빠의 품에 안기듯 의지하고 , 타인 때문에 금가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친구입니다.

숫타니파타/전재성 역주/ 2004/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밭갈기의 경

7.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부끄러움이 자루이고 정신이 끈입니다. 그리고 새김이 나의 쟁깃날과 몰이막대 입니다.
8.몸을 수호하고 말을 수호하고 배에 맞는 음식의 양을 알고 나는 진실을 잡초를 제거하는 낫으로 삼고, 나에게는 온화함이 멍에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9.속박에서 평온으로 이끄는 정진이 내게는 짐을 싣는 황소입니다. 슬픔이 없는 곳으로 도달해서 가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10.이와 같이 밭을 갈면 불사의 열매를 거두며, 이렇게 밭을 갈고 나면 모든 고통을 해탈합니다.

숫타니파타/전재성 역주/ 2004/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파멸의 경

4.번영하는 사람도 알아보기 쉽고, 파멸도 알아보기 쉽습니다. 가르침을 사랑하는 사람은 번영하고, 가르침을 싫어하는 사람은 파멸합니다.
6.참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사랑하고, 참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며, 나쁜 사람이 하는 일을 즐기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읠 문입니다.
14.엄청나게 많은 재물과 황금과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이 혼자서 맛있는 것을 먹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
16.혈통에 자부심이 강하고, 재산을 자랑하며, 가문을 뽐내고, 자기의 친지를 멸시하는 사람이 잇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
18.여색에 미치고, 술에 중독되고 도박에 빠져있어, 버는 것마다 없애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
26.왕족의 집안에 태어나더라도, 권세는 작은데 욕망만 커서, 이 세상에서 왕위를 얻고자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

숫타니파타/전재성 역주/ 2004/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15년 4월 26일 일요일

코뿔소의 외뿔의 경

2. 교제가 있으면 애착이 생기고, 애착을 따라 이러한 괴로움이 생겨나니, 애착에서
생겨나는 위험을 살펴,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3.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정을 나누며 마음이 얽매이면 유익함을 잃으니 사귐에서 오는 이러한 두려움을 살펴,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사 가라.
5. 숲 속에 묶여 있지 않는 사슴이 초원을 찾아 거닐듯, 현명한 자라면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며,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6. 동료들과 쉬거나 서있거나 가거나 또는 거닐면 항상 요구가 많다. 남이 탐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며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11.만일 그대가 어질고 단호한 동반자, 성숙한 벗을 얻는다면, 어떠한 난관들도 극복하리니,기쁘게 새김을 갖추어 그와 함께 가라.
16. 이와 같이,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잔소리와 말다툼이 일어나리라. 장차 이러한 두려움을 잘 살펴, 코뿔소의 외뿔 처럼 혼자서 가라
20. 사교적 모임에 탐닉하는 자는 일시적 해탈에도 이를 수 없다. 태양의 후예가 한 말씀을 명심하여,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26.자식과 아내, 아버지와 어머니 재산도 곡식도,친지들도 모든 감각적 쾌락의 경계까지도 다 버리고,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27. 이것은 집착이다. 여기에는 행복이 없다. 이곳에는 만족은 적고 괴로움이 많다. 이것은 낙시바늘이다 라고 알아 현자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33. 이전의 즐거움과 괴로움, 만족과 불만을 벗어버리고 청정하고 고요한 평정을 얻어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41. 이익을 꾀하여 사귀고 또한 의존하니 오늘날 이익 없이 사귀는 벗들을 보기 드무네. 자신의 이익에만 밝은 자는 청정하지 못하니,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전재성 역주/ 2004/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15년 4월 23일 목요일

부왕과의 대화

태자는 본래 나의 집에 있을 적앤
보배 수레라는 코끼리를 탔었는데
이제는 발로서 땅을 밟으니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딥니까?

수레와 말은 나고 죽음의 탈것이라
위태로운데 어찌 오래 편안할 수 있으리까.
다섯 가지 신통을 타고 달리면
가는 데에 한계나 걸림이 없습니다.

본래 칠보의 옷을 입었기에
진기하고 아름다워 매우 고왔는데
머리 깎고 누더기 걸치고 있으니
어찌 부끄럽다 하지 않겠습니까?

부끄러움으로써 의복을 삼았나니,
세속의 옷은 먼지와 때만 더할 뿐
법의 옷이야말로 참된 이의 옷이며
마음을 쉬었기에 여래라 부릅니다.

본래는 금과 은의 그릇을 썼으므로
여러맛이 매우 향기롭고 좋았는데
지금은 다니면서 걸식하니
거칠고 나쁜 것을 어찌 삼켰습니까?

법의 맛이 도의 음식이 되었기에
굶주림은 이제 이미 없앴거니와
세상을 가엾이 여기기에 발우를 지니고
걸식하면서 중생을 복되게 합니다.

본래는 따로 지은 궁에 있으면서
뭇 궁중 기녀들이 모시고 지켰거늘
혼자서 사니안 나무 사이에 있으면서
어지 두렵지 않겠습니까?

나고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서
이제는 이미 본래 없음에 들었으며
근심과 기쁘다는 생각 없으므로
머무는 곳을 도량이라 합니다

본래 나의 집에 있을 때에는
향즙을 넣어 목욕하였거늘
산이나 나무들 틈에 살면서는
어떠한 물건으로 몸을 씻었습니까?

도의 곳간을 목욕못으로 삼고
선정의 물로 그 연못을 채워서는
몸을 씻어 이미 삼독을 다했으며
세 가지 신통지로 비할바 없이 상쾌합니다


아함경 -불설중본기경 상권/ 고익진 엮음 /담마아카데미/2014


색욕, 탐욕, 법

뜻이 방탕하여 음욕을 행하면
음욕을 즐길수록 그 뿌리 더욱 깊어지네.
색을 탐내면 원한과 재앙만이 늘어나고
색욕을 떠나면 근심이 없어지리라


탐욕이 마음의 밭이 되면
탐욕에 집착하는 마음은 씨앗이 되느니라.
탐욕을 끊고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면
다시는 가고 옴의 근심이 없으리라


만약 어떤 이가 백 살을 살면서
불을 받들고 다른 술법을 닦는다 해도
바른 진리를 받들면서
그 광명이 일체를 비추는 것만 못하리라.

만약 어떤 이가 백살을 살면서
삿됨을 익히고 뜻이 착하지 못하면
하루를 살면서도
힘써 바른 법을 받드는 것만 못하리라.

아함경 -불설중본기경 상권/ 고익진 엮음 /담마아카데미/2014

선행을 하던 이가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며

사람이 태안에 있을 때 더럽지 않고
깨끗한 곳에 있으면서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며
고통이 있더라도 많지 않다면
만약 이와 같다면 누가 세간을 즐기지 않으리오.

사람이 늙어도 모습이 변하지 않고
선행을 하던 이가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며
사랑하다가 이별을 하여도 고통이 되지 않는다면
만약 이와 같다면 누가 세간을 즐기지 않으리오.

병들어 야위어도 큰 두려움이 없고
후세에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으며
지옥에 떨어져도 고통이 없다면
만약 이와 같다면 누가 세간을 즐기지 않으리오.

젊음의 아름다운 모습은 변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에 집착하지 않으며
죽음에 이르러도 두려움이 없다면
만약 이와 같다면 누가 세간을 즐기지 않으리오.

어리석음이 있더라도 깊지 않고
성냄이 있더라도 강하지 않으며
오욕락으로 오염되지 않는다면
만약 이와 같다면 누가 세간을 즐기지 않으리오.

어리석은 사람과 같이 살지 않고
모든 어리석은 생각이 사람에게서 사라지며
모든 어리석은 이에게서 어리석은 생각이 없어진다면
만약 이와 같다면 누가 세간을 즐기지 않으리오.

여러 악한 종류의 무리들이 하나도 없고
모든 악법이 사람에게서 사라져 멸진하며
모든 악한 생각이 하나도 없다면
만약 이와 같다면 누가 세간을 즐기지 않으리오.

세간의 악이 다 멸하고
악행이 멸한 뒤에는 다시 생겨나지 않으며
모든 악행이 다 멸하여 실체조차 없다면
만약 이와 같다면 누가 세간을 즐기지 않으리오.

하늘의 음식과 복이 항상 줄어들지 않고
사람의 수명은 영원하며
어느 곳으로도 윤회하지 않는다면
만약 이와 같다면 누가 세간을 즐기지 않으리오.

오욕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육입에 괴로움이 없고
일체 세간이 고통이 아니라면
만약 이와 같다면 누가 세간을 즐기지 않으리오.

아함경 -수행본기경/ 고익진 엮음 /담마아카데미/2014

죄와 복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 몸이 죽게 되면
정신도 그 형상이 없을 것이나
가령 죽었다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죄와 복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세상으로 끝날 것이 아니건만
어리석어서 오래 살기를 애착하니
이로 인해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으며
몸은 죽어도 정신만은 없어지지 않으리라

허공도 아니요 바닷속도 아니며
산이나 돌 틈에 들어가도 안 되리니
죽음을 벗어나서 더 이상 받지 않을 곳
그 어디에도 없으리라

아함경 -수행본기경/ 고익진 엮음 /담마아카데미/2014

2015년 4월 10일 금요일

천한 사람의 경,


10.마을들뿐 아니라 도시들을 파괴하거나 약탈하여,독재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 있다면 그
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
25. 남을 화내게 하고, 이기적이고, 악의적이고, 인색하고, 거짓을 일삼고,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

28.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인 것이 아니오, 태어나면서 브라만인 것도 아닙니다.행위에 의해 천한 사람도 되고, 행위에 의해서 브라만도 되는 것입니다. 





숫타니파타/전재성 역주/2004/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15년 3월 28일 토요일

정서성

정서성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는 특성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정서성이 높은 사람들은 신체적 위험에 처하는 것에 무서움을 많이 느끼고 그 상황을 회피하려 합니다. 이들은 자신과 가족의 신체적 안녕에 대해 많이 걱정합니다. 이들은 곤경에 처했을 때 타인의 정신적 물질적 도움과 자원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친한 친구나 가족에 대한 정서적 유대감과 애착이 아주 강합니다.
정서성에 내재해 있는 자신과 가족에 대한 보존 욕구는 여러 방식으로 나타나빈다. 정서성이 높은 사람은 심리학자들이 개념화한 '분리불안장애'를 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장애는 주로 아이들에게서 나타나지만 어른들에게서도 종종 보입니다. 예컨데 어떤 사람들은 배우자나 아이들이 단 하룻밤이라도 떨어져 지내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거의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위험한 일을 강박적으로 상상해서 자신을 괴롭힙니다.
이들은 여러 공포 증상을 발전시키기도 합니다. 동물, 피 , 주사, 충돌, 추락, 폐쇄 따위의 여러 물리적 위험에 대해 강렬한 공포를 느끼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

앞서 기술한 대로 정서성이 높은 사람은 가족과 친지에 대한 강한 정서적 애착을 나타내고, 이것은 그들에 대한 이타성을 증진시킵니다. 바꾸어 말하면 정서성이 높은 사람은 진화생물학자들이 말하는 친족이타성이 높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정서성, 즉 친족 이타성이 매우 높을 뿐 아니라 상호 이타성을 나타내는 성격 요인인 정직성과 원만성도 모두 높은 사람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이 사람은 남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한량없이 주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 세 차원에서 모두 낮은 사람들은 인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아주 고약한 사람들이겠지요


H펙터의 심리학/이기범,마이클 애쉬튼 지음/2013/문예출판사



교활하게 울고 보채는 '낮은 정직성-높은 정서성' 유형

정직성과 정서성이 둘 다 낮은 사람에 비해서 정직성은 낮고 정서성은 높은 사람들은 그다지 위험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겁이 많아서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한 모험 행동을 꺼려하는 편이지요. 그리고 이들은 정 때문에 사람들을 완전히 매정하게 내몰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성격 프로필을 가진 사람들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들도 남을 이용하려 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남과 싸워서 생기는 위험은 피하고 싶어 하므로 남들이 잘 눈치채지 못하는 미묘한 방식으로 타인을 이용합니다. 즉 정직성도 낮고 정서성도 낮은 사람들은 남과 싸울 때 절대 기죽을 사람이 아닌 반면, 정직성은 낮지만 정서성은 높은 사람들은 이런 경우 슬슬 발뺌을 하려 할 것입니다. 이들이 행동하는 걸 보면, 아마 교활한 여우나 겁쟁이란 말이 떠오를 것입니다.(이 성격 프로필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영웅' 이미지와 정반대지요. 영웅들은 언제나 정직성이 높고 정서성이 낮은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예컨데 전형적인 액션 영화의 주인공, 말하자면 경찰관이나 스파이는 언제나 터프하고 용감하며 정의를 위해 싸웁니다. 이들은 그렇게 다정다감하지는 않지만 절대 부패에 빠지지 않고 정의롭게만 행동합니다)
또한 정직성이 낮고 정서성이 높은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이용해서 (또는 과장해서) 자신이 원래 받아야 할 몫보다 더 많이 챙기려 합니다. 시험 때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시간을 벌거나, 숙제 마감시간을 늦추려고 꾀병을 부리거나, 잡다한 변명거리를 끊임없이 들이대는 학생들이 아주 많지요 . 이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이렇듯 다소 대범해 보이지 않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편입니다. 배우자나 애인이 무엇이든지 다 해주고, 언제나 무언가를 가져다 바치도록 조종하는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슬퍼하고 토라져 있으니까요) 사람들도 이런 부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두려워해야 할 사람들은 아닙니다만, 울고 보채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식의 교활함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꽤 짜증스러운 타입일 수 있지요 .



H펙터의 심리학/이기범,마이클 애쉬튼 지음/2013/문예출판사

2015년 3월 27일 금요일

유대인의 비즈니스 10계

1.계약은 생명처럼, 우리 조상은 야훼와도 계약했다
2.서명은 신중하게, 운명이 왔다갔다 한다
3.막히면 뚫어라, 모든 길은 마음에서 나온다
4.온 세상이 장사거리, 흰 구름도 쥐어짜면 비가 된다
5.올바른 장사를 하려면 시장으로 가라
6.평생 신용을 지켜라, 신용이 없으면 문이 열리지 않는다.
7.한 우물을 파라, 결국 맑은 물이 용솟음칠 것이다.
8.항상 수집하는 정보에 거래 성패가 좌우된다.
9.체면과 형식에 사로잡힌 자는 알맹이가 없으니 멀리 하라
10. "유대인이 세계 경제를 좌우한다"는 이방인은 곧 칼을 들이댄다


/대한무역진흥공사 텔아비브 무역관 /

2015년 3월 26일 목요일

문명과 억압 ,리비도

◆ 문명과 억압의 상관관계
▲ 문명은 억압을 요청한다. 
프로이트 역시 문명이 본능을 억압한다고 말했고, 그로 인해 문명은 신경증에 걸려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유로운 본능충족의 관점에서 문명은 불만스럽다. 문제는 서구 문명, 근대 문명, 자본주의 문명 등 ‘어떤’ 문명이 아니고 “모든 문명은 강제와 본능억제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라이히와 마르쿠제는 이 ‘모든’을 ‘어떤’으로 바꿨고, 억압적이지 않은 문명의 가능성과 그 조건을 탐색한 것이다.
그럼, 프로이트는 왜 모든 문명은 반드시 억압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한 걸까? <문명은 억압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문장을 <문명은 억압을 요청한다>로 바꿔 쓰고 다시 두 문장으로 고쳐 써 보자. <문명은 억압을 필요로 한다>와 <문명은 억압을 욕망한다>로. 첫 번째 ‘필요’는 수동적 요청이고, 두 번째 ‘욕망’은 능동적 요청이다.

▲ 문명은 억압을 <필요>로 한다.
- 노동과 자연
문명의 억압은 <필요>의 차원에서 고찰된다. 필요(need)란 인간 유기체가 자연(1차 자연으로서의 자연환경과 2차 자연으로서의 현실환경) 속에서 생명활동을 지속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욕구need(자아보존 욕구, 식욕)를 의미한다. 즉, 필요란 <먹고 사는> 문제에 호응하는 식욕과 자기보존 본능으로 표상된다. 필요의 차원에서 <문명은 필연적으로 완전한 욕구충족을 제한해야 한다> 이 필요성, 혹은 필연성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필요의 차원에서 문명은 자연과의 대결 속에서 규정된다. 문명이란 인간 유기체가 자연 환경 속에서 생존을 영위하는 ‘동물적’(자연적: 야생적)이지 않은 방식이다. 프로이트는 그 ‘인간적’ 생존 방식을 ‘노동’과 ‘분배규칙’에서 찾았다.

- 프로이트에 따르면, 문명은 두 가지 기본적인 능력으로 규정되는데, 첫 번째는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 자연의 부를 빼내는 능력>이고, 두 번째는 <인간상호간의 관계를 조정하고 분배의 규칙을 정하는 능력>이다.
첫 번째 규정 속에서 인간문명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시작되었다. 자연과의 투쟁 속에서 인간은 ‘노동’과 노동수단, 즉 ‘도구’를 이용한 기술을 발달시켜, 자연의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자연을 착취하기까지 한다.
 두 번째 규정은 첫 번째 규정과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a)생산력의 양은 무한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분배의 문제가 발생하며(희소성) b)노동의 조직과정에서 어떤 인간은 다른 인간의 본능충족을 위한 대상이 되기 마련이고(계급성) c) 자연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인간은 집단생활을 해야 했고 공동생활 속에서 개인은 항상 자신의 욕구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집단성)
- 첫 번째 측면에서 문명은 노동기술의 발달에 따라 자연의 폭력과 희소성으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지지만 두 번째 측면에서 문명은 개개인의 욕구를 억제하는 법과 제도 때문에 자유로부터 멀어져 간다. 이 지점에서 문명의 ‘불만’ 내지 ‘모순’이 발생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이것을 첫 번째, 생산력의 발달에 조응하는 두 번째, 생산관계의 교체를 통해 해소시키지만, 프로이트에게 이 모순은 해소 불가능한 아포리아이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과연 실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모든 문명은 강제와 본능 억제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부분이 정치경제학적 관점으로부터 정신분석이 분리되어 나오는 지점인데, 이에 대한 논의는 잠시 미뤄두자.
- 프로이트에 따르면, 문명은 자연과의 대결에서 결코 완전한 승리를 구가할 수 없기 때문에 욕구불만 역시 완전히 해소될 수 없다. 지진, 폭풍, 홍수, 전염병,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자연의 위협 앞에서 문명은 근본적으로 무력하다. 완전히 길들일 수 없는 자연, “인간은 그것을 운명(아난케Ananke)이라고 부른다.”
“자연의 부를 빼내는 능력”으로서의 노동과 “분배의 규칙”을 요청하는 자연의 희소성(아난케)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프로이트는 물론이고 마르크스주의자들까지 인간(문명)의 본질로서의 노동과 자연의 본질(아난케)로서의 희소성의 대립관계만 파악할 뿐 상호규정성은 놓치고 있다. 인간의 본질로서의 ‘노동’이라는 개념과 자연의 본질로서의 ‘희소성’의 개념은 서구의 인식론적 지평에서 특정한 순간에 상호의존적으로 출현했다.
- 그 두 개념을 출현시킨 인식의 장은 19세기 경제학의 에피스테메이다. 고전주의 시대에 ‘부’를 표상하는 방식과 19세기에 ‘부(가치)’를 이해하는 방식은 전혀 달랐다. 고전주의 시대 중상주의자들에게 ‘희소성’이란 개념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노동과의 관계에서 규정된 게 아니라 “자기가 소유하지 않은 물품의 표상”으로 존재했다. 고전주의 시대에 ‘부’는 교환의 테이블 위에서 ‘필요’가 표상되는 방식 속에서 정의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 표상의 질서가 붕괴된 자리에 인간의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가치’라는 개념이 출현했다.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면서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로 규정되었고, 자연은 ‘불충분함’을 내재하게 되었다. 희소성의 “근저를 이루는 것은 필요도 아니고, 필요의 표상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근본적인 불충분함일 뿐이다. 사실상 노동 - 경제활동 - 이 세계의 역사 속에서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은 인간이 너무 많아져서 토지에서 자연적으로 생산되는 결실의 양만으로는 더 이상 충당되지 않을 때였다.… 따라서 경제를 가능케 하고 필요하게 하는 것은 희소성의 항구적이고 기본적인 사항이다.” 즉, 19세기에 들어와서 가치(부)는 자연에 내재하며 화폐(금)에 의해 표상(교환)되는 게 아니라, 자연의 희소성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 유기체의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 인간(문명)의 노동이 자연의 희소성(need)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프로이트)과 생산력의 발달에 의해 극복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마르쿠제)의 차이는 동일한 에피스테메 속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말싸움에 불과하다. 인간의 노동과 자연의 희소성은 애초부터 같은 (19세기 근대 에피스테메의) 배에서 태어난 쌍생아이다. 자연의 결핍(희소성)은 인간의 노동이 설정되는 순간부터 선험적으로 해소불가능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스탈린식 ‘생산력 주의’의 내적 모순이다.

◆ 득이 되는 문명, 해가 되는 문명
▲ 리비도의 해방
- 마르쿠제 역시 이 <노동가치론>, <생산력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본능충동을 대표하는 에로스와 문명 사이의 불화는 노동의 근본적 필요성이라는 ‘현실원칙’에서 비롯된다. 그에 따르면, “자유로운 리비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노동의 관계와는 적대적이며, 활동력은 노동의 관계를 조직하기 위하여 자유로운 리비도의 관계로부터 물러나야 한다. 만족의 결여만이 노동의 사회적 조직을 유지한다.” “노동의 근본적 필요성”, 즉 문명의 수립과 발달을 위해서는 프로이트가 제기한 ‘현실원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만, 이 현실원칙은 노동의 조직화 방식에 따라 각기 다른 ‘수행원칙’을 추가로 요청하는데, 생산력의 발달은 소외된 노동을 강요하는 억압적 제도를 철폐하도록 추동하고(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 노동시간을 줄여 쾌락을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을 증대시킨다고 한다. 그 마지막 도달점은 완전 자동-기계화를 통한 노동해방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작업시간과 에너지가 최소로 감소된다면 억제의 근거가 사라지고 리비도는 해방된다”
- 노동생산성과 기술의 발달이 그 자체로 쾌락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님은 프로이트 시대 문명비판론자들도 알고 있었다. “여기서 비관적인 목소리가 들린다....거리를 줄이는 철도가 없다면 자식은 애당초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테고, 자식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전화를 놓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대양을 건너는 여행이 도입되지 않았다면 친구는 애당초 항해를 떠나지도 않았을 테고, 친구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전보를 받고 친구에 대한 걱정을 달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청결과 위생이 문명의 특징이라고 했는데, 구강청정제가 없었다면 입냄새는 나지 않았을 것이고, 겨드랑이털 제모제가 없었다면 겨드랑이 털은 혐오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의료기술은 어떤가? “사회들은 그들이 치료할 수 있는 병들만을 허용하며 병리학적으로 정통해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과학과 기술로 새로운 치료법을 수없이 개발해 내는 우리의 문명이 그다지도 많은 질병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아닐까?
- 이것은 프로이트의 말처럼 ‘행복의 주관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욕구(결여)의 사회적 객관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노동(문명)은 자연의 결핍(희소성)을 정복하거나 못하지 않는다. 노동과 노동을 조직하는 ‘수행원칙’, 혹은 ‘사회적 관계 형식’이 결핍(욕구)을 생산하는 것이다.
▲ 문명과 야만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자들까지 포함하여 문명론자들은 한결같이 문명을 야만과 대비시켜 파악했고, 야만인, 혹은 원시인의 경제생활은 자연의 위협과 희소성에 압도되어 먹고사는 문제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야 하는 욕구(결핍)의 경제, 생존의 경제로 보았다. 문명은 노동과 기술을 통해 이로부터 탈출한 상태라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하지만 민족지학자들이 한결같이 보고하는 바에 따르면 소위 원시인들의 생활은 결코 ‘빈곤’하지 않았다. “남아메리카에서는 한결같이 인디인들이 게으르다고 말한다...야노마미족의 경우 하루에 1인당 세 시간의 평균적인 활동을 하면 사회의 모든 필요가 충족된다. 대부분의 원시사회가 그렇다. 하루에 21시간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지내므로 이들의 문명을 오락의 문명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들은 지루해하지 않으며 낮잠, 익살, 논쟁, 마약, 식사, 목욕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
- 자연의 희소성, 삶의 빈곤함은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노동가치론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산물이다. 자본주의는 그 시초부터 원주민들의 자급생활의 수단인 빵나무를 베어내고 그들의 공유지에 울타리를 쳐서 빈곤(결여) 상태로 내 몰았고 그 결여를 극복하기 위해 공장에서 노동력을 판매하는 프롤레타리아가 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가 자랑하는 생산성의 증진은 더 많은 기계의 도입을 가져왔다. 그 기계의 리듬에 맞추면서 ‘생산성이 증대하면 나머지 시간은 놀고먹던’ 사람들은 ‘더 많은 양을 생산하는’ 노동기계로 전락했고, 잉여 노동력은 빈곤의 공포지대, 즉 실업자의 삶으로 밀어 넣었다. 이 산업예비군의 빈곤은 거꾸로 자본가들이 노동력(임금) 시장에서 싼 값으로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했다. 빈곤(결핍)은 ‘잉여’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문명의 산물이다.


출처

정신분석학입문:프로이트 파농 푸코 지젝 탐구 강사 박정수 강의록 제 7강 문명의 영향력과 정신분석1

흑인의 불어, 남근/결여의 기표

프란츠 파농은 1927년 프랑스령 앤틸리스(서인도) 제도, 마르티니크 섬의 포르 드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과 프랑스 출신의 백인, 그리고 그들 사이의 혼혈인(뮬라토)으로 구성된 이 프랑스 식민지에서 태어난 인간은 어떤 언어 속으로 태어날까? 대부분의 하층민들은 일상어인 크레올을 사용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중산층은 표준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이러한 이언어적 현실은 프랑스의 식민지 동화정책의 산물이다. 프랑스는 마르티니크 흑인들을 피지배자가 아니라 프랑스 국민으로 인정했고, 프랑스 국민이라면 프랑스어를 훌륭하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유혹했다. 그 유혹에 이끌린 식민지인들은 프랑스 국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일상어인 크레올을 억압해 왔다. 그러나 식민지 동화정책은 문자그대로 실현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식민지에 대한 착취와 차별이 없다면 식민지는 존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민지 동화 정책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라! 라는 공식적인 명령과 식민지 언어(크레올)를 사용하라! 라는 이면의 명령을 동시에 발한다.
- 이런 식민주의의 이중구속 속에서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주체-위치를 결정하는 물신화된 상징이 된다. “불어 구사능력에 따라 백인화의 정도를 평가받는 것이다.”프랑스어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바꾸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소유함으로써 “밀림의 신분”, “원시인”, “흑인”의 존재를 폐기하고 문명화된 백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을 결여된 존재로 인정하고, 불어를 소유함으로써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이 식민화된 소망은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여성이 갖는 남근 선망과 상동적이다. 남근이 결여된 자신의 결여를 인정하고 남근을 가진 남자나 남근의 대리물인 아이를 소유함으로써 결여를 메우고자 하는 것이 여성의 외디푸스 콤플렉스 해소방법이라는 점에서. 식민주의 속에서 내지의 언어(불어)는 남근의 상징이다. 식민주의 속에서 식민지가 여성으로 성별-표상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그러나 식민지인들의 사회-상징적 ‘여성화’는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의 ‘여성화’보다 더 어렵다. 자신의 결여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불어를 완전히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타자가 그의 존재 변이를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소망은 억압된 타자성을 살고 있는 식민지 원주민에 의해, 그리고 자신의 백인화를 인정해 줄 프랑스인들에 의해 좌절된다. 먼저, 식민주의적 욕망의 헛됨을 알고 있는 원주민 아버지의 폭력에 의해 그들의 백인화는 좌절된다. 다음의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사례: “프랑스에서 몇 개월을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한 꼬마가 있었다. 농기구를 보면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저 농기구 이름이 뭐였지요? 그의 아버지가 그 농기구를 그 꼬마의 발등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의 정신이 번쩍 들더니 이내 기억상실증이 사라졌다.”
- 프로이트가 『일상생활의 정신병리』에서 보고하고 있는 ‘망각’의 사례들과 비교해 봄 직하다. 이 신출내기 흑인 유학생의 ‘망각’은 크레올의 ‘억압’에 기인한 것이다. 그것을 간파한 크레올 사용자인 아버지는 “놀라운 방법”으로 그의 단어 망각을 치료해준다. 사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단순하지만 심오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리적으로, 폭력적으로 대면시킨 것은 단지 ‘농기구’의 사물성이 아니다. 그것은 ‘흑인’의 사물성이다. 다행히 풋내기 아들의 억압이 심각하지 않아서 그렇지, 심했다면 자신이 억압한 흑인성과의 이 폭력적 대면은 아들을 정신병으로 몰아갔을 것이다.
다음으로, 불어의 소유를 통한 백인화의 소망은 식민모국의 타자에 의해 좌절된다. 프랑스로 유학을 간 마르티니크 지식인들은 아무리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해도 결코 자신을 백인으로 봐 주지 않는 프랑스인들을 만나게 된다. 까만 피부라는 물질성 앞에 불어의 상징성은 무력하기 그지없다. 일단, 프랑스인들은 흑인을 만나면 마치 어린애한테 말하듯 반말 투의 피진을 사용한다. 기차를 타고 옆자리 승객에게 정확하고 분명하게 "실례합니다. 식당 칸이 어딘지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라고 물어봐도 그들은 여지없이 피진을 사용해서 대답한다. 심지어 앙드레 브레통 같은 진보적인 예술가조차 세자르에 대해 “여기 오늘날 그 어떤 백인들도 감히 구사할 수 없는 정도의 수준으로 불어를 부릴 줄 아는 한 흑인이 있다”라는 식으로밖에 평가하지 못한다.

◆ 불어의 남근적 상징과 흑인의 선망
▲ 남근 기표 = 결여의 기표
불어의 남근적 위력은 식민지 마르티니크 사람들이나 그보다 훨씬 덜 동화된 세자르 흑인들에게나 통할 뿐 정작 프랑스 본국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흑인의 불어는 흑인의 열등감을 더욱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기표가 될 뿐이다. ‘쯧쯧. 저 흑인은 자신의 흑인성을 벗기 위해 얼마나 애썼으면 저렇게도 불어를 잘 할꼬..’ 식민지에서의 남근 기표가 식민모국에서는 결여의 기표로 전도되는 것이다. 왜 이런 전도가 일어나는 걸까? 원래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남근이란 실재의 성기가 아니라 ‘이미 없거나’(여자아이) ‘없어질 수도 있는’(남자 아이) 것으로서만, 즉 결여(부재)의 형식 속에서만 작동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물론,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남근의 기능은 성적 차이를 도입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식민지인에게 불어는 마치 그것을 가지면 백인이 될 수 있을 것처럼 유혹적이지만, 그것은 식민지와 식민지본국의 차이를 도입하기 위한 가상의 미끼일 뿐이다. 그것을 선망하면 할수록, 그것을 소유하면 할수록, 식민지 흑인의 결여는 더욱 선명해진다.
▲ 흑인의 남근-선망과 남근-되기
- 식민화와 외디푸스화의 결합은 성 대상을 선택하는 데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외디푸스화된 식민지 여성은 백인 남성의 남근을 소유함으로써, 백인과 가까운 아이를 소유함으로써 흑인성으로부터 탈출하려 한다. 뮬라토 여성이라면 이런 소망은 더욱 강렬해진다. 그래서 뮬라토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한 흑인 남성은 “‘백인 여성’의 명예를 먹칠했다는” 죄로 법정에 제소를 당해야 한다. 뮬라토 여성에게는 백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남근 선망)과 함께 흑인으로 되돌아 갈 지로 모른다는 공포(거세 공포)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들도 알게 되리라. 백인 남성들은 결코 흑인 여성들과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백인 남자의 아내로서, 백인 아기의 엄마로서 백인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하는 것도 전혀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다. 어차피 백인 사회의 주인은 백인 남성이므로, 식민지 흑인 여성의 외디푸스적 소망(결여를 받아들이고 남근과 아이를 통해 결여를 치유하고자 하는 소망)은 백인 남성의 성적 판타지와 관용에 의해 언제라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게 아닐까?
- 식민지 흑인 남성 역시 “나를 사랑해주는 백인 여성”을 통해 백인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사랑’을 통한 흑인 여성의 백인화 소망과 흑인 남성의 백인화에는 성적 차이가 있다. 흑인 여성은 백인 남성의 사랑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남근을, 혹은 백인 아기를 원하는 데 반해, 흑인 남성은 백인 여성의 사랑을 원하거나 백인 여성의 몸을 정복하고자 한다. “나의 지칠 줄 모르는 손이 그 순백의 젖가슴을 애무하는 순간 백인의 문명과 존엄이 내 손아귀 속에서 내 것으로 화하는 것이다” 그에게 백인 여성은 그 자체로 남근적인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은 “백인 남성처럼 사랑 받는” 것이다. “나를 사랑해주는 백인 여성”, 내 밑에 깔려 있는 백인 여성을 통해 그는 백인 남성과 동일화되기를, 백인 남성의 성적 위치를 차지하고 싶은 것이다. 이 식민주의적 욕망은 동시에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남자아이에게 배당된 욕망이다. 아버지와의 동일시. 흑인 남성의 성적 판타지에서 그가 동일화한 백인 남자는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아버지의 자리에 있다.
- 백인 여성의 몸을 정복함으로써 백인 남성의 자리를 차지하는 성적 판타지는 전형적인 식민지 민족주의의 판타지이다. “약 30여년 전에 석탄처럼 새까만 한 흑인 남자가 파리에서 미친 금발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오르가즘에 도달할 찰라, 그는 갑자기 ‘슐레허 만세’라고 소리쳤다.”) 94년 르완다 사태를 다룬 <호텔 르완다>에서 후투 민병대가 미친 들개처럼 투치족 여성들을 창녀 취급할 때, 거기서도 벨기에 식민모국에 의해 선택받은 투치 여성들에 대한 후투족의 민족주의적 리비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녀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학생출신 노동지도자(독고영재 분)가 시위 한 가운데서 여공(정선경 분)을 후배위로 공격하면서 ‘파쇼 타도!’를 외치는 장면도 유사하다. 사회적 억압에 대한 분노가 여성을 향한 리비도적 공격으로 표출되는 이 장면들에서 피억압 남성들은 억압자에 대한 ‘증오’의 이면에 억압자와 동일화되고 싶은 욕망을 감추지 못한다. 백인남성의 노예였던 흑인 남성들은 백인 여성을 통해 “주인이 되고 싶어한다.”
 -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흑인 지식인은 “나를 사랑해 주는 백인” 여성이 다가와도, 자기 역시 그녀를 사랑해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녀에 대한 사랑에서 “백인여성의 순백한 살결”에 대한 ‘흑인’의 성욕을 발견하고, 그 속에 섞여있는 “수세기에 걸쳐 내 종족에게 가해를 입혔던 백인”에 대한 ‘흑인’의 증오를 읽어내기 때문이다. 그의 ‘포기’는 이중적이다. 백인여성을 향한 사랑의 포기에는 백인남성을 향한 리비도적 증오의 포기가 포개진다. 한마디로, 그의 ‘포기 신경증’은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 ‘흑인성’의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그의 포기신경증은 외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된다. “한때 아주 오래 전에 내가 한 대상과의 관계를 시도했으나 버림받고 말았다는 것 때문이다. 그 대상인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버림받음의 고통, 그것을 내가 당한 만큼 타인에게 되갚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내 복수욕을 재확인하겠다는 것이다.”) 이 부정적-공격(negative aggress) 성향이 백인남성들도 겪는, 따라서 보편적인 유아기 콤플렉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백인남성-백인여성-흑인남성 사이의 인종주의적 삼각관계가 아버지-어머니-아이 사이의 외디푸스적 삼각관계와 동일한 구조, 즉 <권력의 담지자-욕망의 대상-결여된 주체>의 구조를 갖는다는 점에서는 맞다. 하지만 이 구조적 상동성으로부터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보편적으로) 먼저 있고 그것이 성인 사회의 (특수한) 인종주의 콤플렉스로 투사, 반복된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외디푸스 콤플렉스야말로 결여를 중심으로 한 권력과 욕망의 삼각함수를 유아기 가족에 투사한 것이다. 아버지-어머니-아이가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이미 권력과 욕망의 함수관계로 형성된 사회적 신체 위에 등록된 흑인 가족이 있는 것이다.




출처
정신분석학입문:프로이트 파농 푸코 지젝 탐구 강사 박정수 강의록
9강 탈식민주의의 언어적 상징

2015년 3월 21일 토요일

사쿠라바 유이치로

신고하고, 식을 올리는 건 나중에 해도 상관없어
그런 것보다 가족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먼저라니까
나도 빨리 식 올리고 싶고 신고도 하고 싶어
하지만 지금 그러면 어떻게 되?
따뜻한 가정을 손에 넣기는 커녕
아버님과 카에데 누님 , 아즈사 누님 사츠키 누님 료군 츠토무군 모두 버리게 되는 일이 될지 몰라 그런 일 죽어도 시키고 싶지 않아.
나도 처음부터 인정받을 생각하지 않았어
나는 23년간 가족을 가지고 싶다고 꿈꾸어 왔어
소중한 꿈이 그렇게 간단히 손에 들어오면 참을 수가 없지
쉽게 이루어지면 오히려 실망하지
참는다고 꿈이 이루어지진 않지
꿈은 갓츠로 얻는 것이야 .
말해두지만 내 갓츠는 보통[이 아니니까

데릴사위02 34:25초~ 36:25


2015년 3월 19일 목요일

무용한 문학의 유용성론-김현 평론가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 준다. 이것이 바로 쓸모없는 문학이 쓸모 있는 이유다.’

힌두성자와 알렉산드로스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는 동방원정길에 힌두 성자를 만났다. 성자는 세계의 정복자라고 알려진 알렉산드로스를 무시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대꾸가 없는 성자에게 모욕을 주어 말문을 열게 만들었다. 성자는 마지못해 그의 말에 대꾸했다.
"왜 내가 오랫동안 여행을 하며 이곳에 왔는지 아는가?"
"그렇게 멀리, 그렇게 널리 헤매는 건 자신이나 백성을 위해서 좋지 않아요.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기가 딛고 서 있는 만큼의 땅만 가질 수 있답니다. 당신도 우리와 같은 인간인데 집에서 멀리 떠나 돌아다니며 많은 이에게 괴로움만 주네요. 당신은 머지않아 죽을 것이고 당신도 그저 당신이 묻힐 한평의 땅만 갖게 될 텐데 말이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을 모욕한 힌두 성자를 그 자리에서 죽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성자를 처형하기 전에 왜 자신을 비판했느냐고 물었다. 모든 걸 다 가진 알렉산드로스가 상상할 수 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당신이 명예롭게 살거나 혹은 명예롭게 죽기를 바랐습니다."










인도는 힘이 세다/이옥순 지음/창비/2013

눈 먼 자들의 도시

'눈에는 눈' 이라는 서구의 논리를 따른다면 이 세상은 온통 눈 먼 사람들로 뒤덮였을 것이다.- 간디

1800년대 전반에 델리지방에 살던 브라만 모한 랄

모한 랄의 선조들은 이슬람제국인 무굴을 위해 일했고 나라로부터 많은 땅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그의 가문은 무굴제국이 내우외환에 시달린 정치격 격변기에 그 땅을 다 빼앗기고 말았다. 카슈미르 출신의 브라만인 모한의 아버지는 모한의 친어머니가 죽자 종교가 다른 무슬림 여성을 새 아내로 맞았다.
모한 랄은 영국인이 델리에 나타나자 재빨리 마음과 충성의 대상을 바꾸었다. 모한은 2년간 델리대학의 한 칼리지에서 영어를 배웠고ㅡ 영어라는 나룻배를 타고 새로운 시대의 강을 헤엄쳐나갔다. 영어를 무기로 삼은 모한은 델리에 있는 한 영국인의 비서로 일했다.
모한은 영국인 상사를 따라 비밀업무를 수행하러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영국인을 위해 일했다. 그뒤에도 다양한 역할로 영국에 봉사한 모한은 그 보상으로 영국으로부터 토지를 받았다. 봉급도 많이 받았다. 델리에서 안정적으로 세력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인 영국 지배자는 모한이야말로 친영파로 유용한 인물이었다. 영국은 모한에 대하여 '새로운 인간형' '새로운 모델의 인도인'이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

그의 변신도 끝이 왔다. 영국에서 귀국한 모한은 별다른 직업을 얻지 못했다. 1857년 세포이항쟁이 일어나자 영국인과 친하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고 도시 밖으로 도망간 적도 있었다. 영국의 외면을 받은 그는 사업에도 실패하고 쓸쓸하게 30년의 남은 생을 보냈다. 진정한 영국인이 되라고 영국으로 보낸 두 딸은 귀국하는 도중에 천연두에 걸려서 모두 죽었다.

인도는 힘이 세다/이옥순 지음/창비/2013

그들이 내게로 오는 어떤 길을 택하든지 ,

어디에서 어떻게 나에게 오든지, 그들이 내게로 오는 어떤 길을 택하든지(...) 나는 그들을 다 받아들인다. - <바가바드기타>

가장 나쁜 죄인이라도 지혜의 배로 죄악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바가바드기타>

2015년 3월 18일 수요일

신학적의미에서 자만

1.하느님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2. '회개와 공로 없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

2015년 3월 17일 화요일

칸트 미학이 지향했던 순수성을 공격하다- 부르디외

◇ 대중 미학의 논리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하자마자 이것이 칸트 미학의 부정적 반대항처럼 보이고, 대중의 에토스는 암묵적으로 「미의 분석학」의 각 명제에 대해 그것을 부인하는 반-명제를 맞세우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미적 판단의 독자성을 구성하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 칸트는 교묘하게 ‘쾌적한 것 또는 맘에 드는 것’과 ‘즐거움을 주는 것’을 구분하며, 더 일반적으로는 명상의 진정 미학적인 특징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특징인 ‘무관심disinterestedness’과 ‘쾌적한 것’을 규정하는 ‘감각의 관심the interest of the senses’, 그리고 ‘선’을 규정하는 ‘이성의 관심the interest of Reason’을 확실하게 분리시키려고 노력했다. 이와 반대로 단순히 기호의 기능에 그치더라도 모든 이미지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기를 기대하는 민중계급은 흔히 아주 분명하게 모든 판단을 내리려고 한다. 따라서 죽은 병사를 찍은 사진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재현 대상의 현실 또는 그런 재현이 수행할 수 있는 기능, 즉 전쟁에 대한 공포심을 갖도록 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그런 공포심을 보여줌으로서 사진가가 보여주려고 하는 전쟁에 대한 공포감을 거부하는 반응을 통해 일정한 판단을 불러일으킨다. (…) 의미도 흥미도 없는 무의미한 이미지 또는 애매한 이미지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그것을 목적 없는 최종목적, 스스로를 의미하는 이미지 따라서 자신 이외의 지시 대상은 갖고 있지 않는 이미지로 간주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2015년 3월 8일 일요일

오징어- 유하

오징어 

                  유하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


삼허

3허

허문도 허삼수 허화평

2015년 3월 7일 토요일

인도 it

독립 이후 인도의 공업입국을 위해 네루 정부에서 야심차게 진행한 IIT 공대 및 유학파 지원 등이 발단이 되어 인도에서는 해외 유학파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그래서 2012년 현재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국제 학생들 중 아시아계에서는 인돈인 학생 수가 중국인 학생 수를 앞질렀다. 또한 2010년 미국 통계 자료에 의하면, 미국에 거주하는 인도인들이 미국 인구의 거의 1퍼센트에 육박하게 되었다. 약 319만명 정도라고 한다. 10년 전 190만 명 정도였으니, 급성장하는 추세임을 알 수 있다.
미국 실리콘벨리 IT 산업종사자의 40퍼센트가 인도인이고, 그 중 7퍼센트가 고용주로 일하고 있으며, 주요 대학 교수직에 인도인 학자들이 포진해 있다는 것은 이제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인도전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는 하지만, 특히 남인도의 안드라프라데시 주를 주목해 볼 많다.
이 주에서는 199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인도의 IT붐으로 인해 주 전체가 IT열풍에 휩싸여 자녀들을 의대가 아닌 이상 공대에 입학시ㅣ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그래서 학부과정을 졸업한 자녀들이 직장이나 대학원을 미국에서 찾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미국의 일부 공업 도시의 인도인 타운에서는 텔루구어(안드라프라데시 주의 언어)가 보편 언어로 사용될 정도다. 2014년 2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최고 경영자로 안드라프라데시 출신 사트야 나델라 Satya Nadella 가 선출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또다른 인도를 만나다/공영수 지음/ 2014/ 평단

1991년 이후 문학 (grand narrative → ethical turn)




—1991년과 더불어 문학과 정치가 아니라 문학과 윤리를 사유할 수 있게 됐다 (grand narrative → ethical turn)
—1997년 IMF 이후 신자유주의 시스템 구축, 윤리는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됐다 (전이 구조 변동 및 MB 정부 등장)
—윤리학적 상상력이 필요, 그것을 통해 문학의 종언 주장을 유예시킬 수 있다 (단편소설과 장편소설 : 문법 비교)

서사윤리학 연습- 신형철선생 강의록

2015년 3월 6일 금요일

2015년 3월 5일 목요일

3종고

1. 고고 Duhkha Duhkha: 오취온고를 제외한 괴로움들.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외부의 조건에서 오는 고통 (suffering by nature).
2. 괴고 Viparinama Duhkha: 괴(壞)자는 '파괴된다, 부서진다'는 뜻으로 집착을 갖는 사물(事物)이 파괴?변화(變化)해 갈 때 느끼는 정신적(精神的) 괴로움.
3. 행고 Samskara Duhkha: 모든 것이 변화되어 달라져 버리는 데서 오는 고통. 현상계(有爲法)가 모두 무상하기 때문에 윤회(輪廻)를 면할 수 없음에서 오는 괴로움이다



불교철학입문1/조성택교수 강의록

여래

여래(Tathagata)’라고 부르라 했는데 이는 tatha와 gata혹은 agata의 합성어로

 ‘이미 존재하는 진리를 발견한 자

2015년 3월 3일 화요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곳에서는 스쳐 지나가야만 한다.

그리하여 많은 군중과 여러 도시를 천천히 지나가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에움길로 그의 산과 그의 동굴을 향해 돌아갔다. 그런데 보라, 그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대도시의 성문 앞에 이르렀을 때, 입에 거품을 문 바보가 두 손을 활짝 벌린 채 그를 향해 뛰어오며 길을 가로막았다.이자는 사람들이 차라투스트라의 원숭이라고 불렀던 바보였다. 왜냐하면 이 바보가 차라투스트라의 문장과 억양을 조금 익혔고 또한 즐겨 그의 지혜를 빌려 썼기 때문이었다. 그 바보가 차라투스트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 차라투스트라여, 여기는 대도시입니다. 여기서 당신은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오히려 모든 것을 잃을 뿐입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이 진흙탕을 걸어서 건너려 하십니까? 당신의 발도 생각하셔야죠! 차라리 이 문에 침을 뱉고 발길을 돌리십시오!
여기는 모든 위대한 감정이 썩어버립니다. 여기서는 매마르게 덜거덕거리는 왜소한 감정만이 덜거덕거릴 수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이미 정신의 도살장과 음식점 냄새를 맡지 못합니까? 이 도시는 도살된 정신이 내뿜는 증기로 자욱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영혼들이 더러운 누더기처럼 축 늘어져 매달려 있는 것을 보지 못합니까? 게다가 사람들은 이 누더기로 신문도 만들지요!
당신은 여기서 정신이 말장난이 되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까? 정신은 역겨운 말의 구정물을 토해 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말의 구정물로 신문을 만듭니다.
그들은 서로 몰아대지만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서로 열을 올리지만 왜 그런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양철판을 두들기고 자기들의 금화를 절겅거립니다.
그들은 추위에 떨며 화주(火酒)로 몸을 녹이려 합니다. 몸이 달아오른 그들은 얼어붙은 정신에서 냉기를 얻고자 합니다. 그들 모두는 병약한 자들이며 여론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온갖 욕정과 악덕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도덕군자들도, 잽싸게 한 자리를 차지한 덕망 높은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 영악한 자들은 손가락을 놀려 글을 써댑니다. 그들의 엉덩이는 앉아 기다리느라 굳은살이 박였지요. 복도 많게 가슴에 별 모양의 장식을 단 그들은 또한 하늘로부터 속을 넣어 빈약한 엉덩이를 부풀린 딸애들을 선사받기도 했습니다.
하늘로부터 별과 자애로운 침이 뚝뚝 떨어집니다. 별로 치장하지 못한 가슴들은 모두 저 하늘을 동경합니다. (....중략)



그러나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거품을 물고 열변을 토하는 바보의 말을 제지하면서 그의 입을 막았다
"제발 그만 하게!" 라고 차라투스트라가 소리를 질렀다. "그대의 이야기와 어투에 구역질을 느낀 지 이미 오래네!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개구리와 두꺼비가 되어야만 할만큼 오랫동안 늪가에 살았더란 말인가?
이제 그대의 핏줄 속으로 썩고 부글거리는 늪의 피가 흐르고 있고, 그 때문에 꿱꿱거리며 욕설을 퍼붓고 있지 않은가?
그대는 왜 숲으로 가지 않았는가? 아니면 왜 대지를 갈지 않았는가? 바다는 푸른 섬들로 가득하지 않은가?
나는 그대의 경멸을 경멸한다. 그리고 그대는 내게 경고하면서 그대 자신에게는 왜 경고하지 않는가?
나의 경멸과 나의 경고하는 새는 오직 사랑으로부터만 날아오를 뿐, 늪으로부터 날아올라서는 안 된다!
입에 거품을 문 바보여, 사람들은 그대를 나의 원숭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그대를 나의 투덜대는 돼지 라고 부르리라. 투덜댐으로써 그대는 바보스러움에 대한 나의 예찬을 욕되게 한다.
애초에 그대를 투덜대게 만드는 것은 누구였던가?아무도 그대에게 충분히 알랑거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그대는 그처럼 요란하게 투덜댈 구실을 마련키 위해 이 쓰레기 더미 위에 앉았던 것이다.
마음껏 복수할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대 허영심에 찬 바보여. 그대가 내뿜고 있는 그 모든 거품은 말하자면 복수심이다. 나는 그대를 꿰뚫어 보고 있다!
그러나 그대의 바보 같은 말은 그것이 지당할 때조차도 내게 상처를 준다! 심지어 차라투스트라의 말이 백번 옳은 경우라 하더라도, 그대는 나의 가르침을 이용하여 언제나 부정을 저지를 것이다!"
(...중략)
슬프도다 이 거대한 도시여! 나는 오래전부터 이 거대한 도시를 태워버릴 불기둥을 보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한 불기둥들이 위대한 대낮보다 먼저 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에도 때가 있고 그것의 정해진 운명이 있는 법!
그대 바보여 작별의 말로 나는 그대에게 다음의 가르침을 전한다.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곳에서는 스쳐 지나가야만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고 바보와 그 대도시를 스쳐지나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장희창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4

불교의 철학적 관점에서 무아

내가 저지른 일은 미래의 나에게 반드시 나타난다. 다만 우리는 이때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무아론의 관점에서는 그게 아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인 김문화와 현재 대학생인 김문화는 같은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서, 엄밀한 철학적 의미에서는 이 둘은 다르다. 이 둘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 즉 동일성을 보지 않는 것이 무아이다. 동일성이 관념일 뿐이라고 깨닫는 것, 그것이 무아이다.

불교철학입문1/조성택교수 강의록 중에서

2015년 3월 2일 월요일

인도에서의 선과 악

우리나라에서 아수라장이라고 말할 때 나오는 아수라는 인도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이름이다. 신화 속의 아수라는 한쪽은 악의 얼굴이고 다른 한쪽은 선의 얼굴이다. 신화에는 악한 아수라들이 고행을 거쳐서 신에게서 강한 능력을 받거나 선한 아수라들이 신들의 속임수에 빠져 타락해 악이 되는 경우가 나온다. 인도에서 신과 아수라는 서구문화권의 서노가 악처럼 딱 부러지게 나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죽은 뒤에 착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과 악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처벌도 일시적이다. 힌두교의 지옥은 다른 종교와 달리 영원히 머무는 곳이 아니다. 극악무도한 일을 저질러도 영원히 벌을 받지는 않는다. 가장 훌륭한 사람은 곧바로 구원을 받지만, 가장 나쁜 사람도 인간에게 하등동물로 떨어졌다가 환생을 통해 결국은 구원을 받는다. 직행이냐 멀리 돌아가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악행에 대한 절대적인 처벌은 없다.
많은 인도인이 성서로 여기는 바가바드기타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엿볼수 있다. 사촌과 전쟁을 앞둔 아르주나는 '싸울 것이냐 말 것이냐'로 햄릿처럼 고뇌한다. 싸우지 않는다면 왕국을 지키는 크샤트리아(왕)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고, 싸운다면 일가붙이를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크리슈나 신은 번민하는 주인공에게 사람을 죽이는 일은 나쁘지만 크샤트리아로서 본문과 의무를 다하는 행동은 나쁘지 않다고 일러준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려고 쓰는 나쁜 방식은 괜찮다는 것이다. 즉 목적이 좋으면 수단은 정당화된다.
인도인은 어렸을 때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상황에 따라 처신하는 법을 배운다. 전통적인 가치관에 따르면 살인은 카스트와 상황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다.아르주나처럼 전쟁터에서의 군인의 살인은 정당하다. 군인과 달리 상인이나 사업가라면 용기보다 돈을 잘 버는 것이 최선이다.


인도는 힘이 세다/이옥순 지음/창비/2013

2015년 2월 26일 목요일

근대의 가치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사람들

근대의 가치 기준이란 이성과 과학의 발전과 뗄 수 없는 관계인 자본주의와 밀접한데, 상품 가치, 생산성 제일주의, 시장 원리로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의 가치를 물려받은 오늘날까지 노인, 장애인, 저학력자나 학교 부적응자 등과 같이 생산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집단들은 우선적인 소외의 대상이 된다. 이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필요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거나 (노인이나 장애인), 그것에 필요한 교육을 마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저학력자), 또는 적어도 사회가 요구하는 훈련 과정을 견뎌내지 못했다는 이유(학교 부적응자)에서 동등한 선원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이 되는 기존 질서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된 일탈 집단들도 배제의 대상이다. 예를 들어 범죄자나 마약 중독자처럼 비교적 일반적인 동의가 가능한 집단들뿐만 아니라, 이혼녀나 동성애자도 현존하는 가치 규범에 어긋난다는 의미에서 소외의 대상이 되며 심지어 뚱뚱하거나 못생긴 사람들조차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상품 가치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된다.
다른 인종이나 다른 민족에 대한 차별과 배척과 근대의 산물이다. 근대의 출발은 자본주의의 탄생과 함께 진행되었고 자본주의적 생산은 국가를 단위로 발전해왔으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민족주의적 단결을 불러일으켰다. (...)민족이 탄생하자마자 이민족이 탄생한 샘이다. 이민족은 국경 너머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경 바깥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자국 영토 안에 산다면 그들은 '우리'와 달라서 민족에 포함될 수 없는 존재, 즉 열등한 존재로 영락없이 소수자가 되었다. 이처럼 근대가 탄생시킨 국가는 민족주의를 낳았고, 민족주의는 그저 '조금 다른'사람들인 이인종과 이민족을 차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인권과 소수자 이야기/박경태 지음/ 이영규 그림/ 2007/책세상

인종주의

철학자 토도로프(Tzvetan Todorov)의 설명

첫째 인간은 공통의 신체적 특질을 가진 서로 다른 인간 집단인 인종으로 나뉘는데, 그들의 차이는 동물의 다른 종들 사이의 차이와 같다. 둘째, 신체적-정신적 특질들은 상호 의존하며 그 특징들은 지속된다. 신체적 특질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자질은 유전으로 전달되며 교육으로 바꿀 수 없다. 셋째, 집단은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개인의 행위는 대체로 그가 속한 인종적-문화적 집단에 의존한다. 넷째, 인종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서로 간에 우열이 있다. 이는 신체적 아름다움이나 지적-도덕적 우열로 나타난다. 다섯째, 이상의 지식에 근거해 도덕적 판단이나 정치적 이상이 나타나고, 이에 따라 열등한 인종에 대한 예속화와 절멸이 정당화 된다.


인권과 소수자 이야기/박경태 지음/ 이영규 그림/ 2007/책세상


2015년 2월 23일 월요일

알리의 징병거부

"난 베트콩하고 싸울 일 없어요. 베트남 사람들은 나를 깜둥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해를 끼치지도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총을 들이댈 이유가 없다.


-징병거부가 불량한 것으로 여겨질 뿐만 아니라 죄악시되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알리의 징병 거부는 반전 운동의 불씨가 된다. 그는 영화, 음악, 스포츠 등 분야를 망라해 징병 반대와 반전의 기치를 내걸었던 최초의 인물이었고, 결국 반전의 상징적 존재가 된다. 그러나 그 대가는 엄청났다. 챔피언 벨트는 물론 선수 자격까지 박탈당하고 무려 3년 6개월간 링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타협하지 않았다. 징병 거부로 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 투쟁 끝에 결국 무죄 판결을 받는다.

어퍼컷/정희준지음/2009/미지북스

성폭행과 공범들

여자 선수들에게 감독은 그냥 감독이 아니다. 군주다. 신이다. 감독의 말을 거역하면 게임 못 뛴다. 더 무서운 건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되거나 잘리는 거다. 특히 박명수 전 감독처럼 국가 대표 팀 감독도 했고 한 팀에서 19년 있으면서 선수 선발권 등 통상적 감독의 권한 외에 선수 연봉 책정 등 행정권과 재정권까지 거머쥔 감독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무모한 짓이다.
 세상을 알기도 전에 농구를 시작했던 이들에게 농구 너머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농구 선수 외엔 친구도 없고 편의점 '알바' 한 번 해본 적 없으며 심지어 식구마저 군인 휴가 나와 만나듯 했기에 이들에게 농구를 그만둔다는 것은 곧 자존의 '사망'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러한 사건이 여성 스포츠계에 비일비재함에도 선수들은 울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선수도, 그 부모들도 가만히 있냐는 질문에 한 체육계 인사는 이렇게 답한다. "일을 당하고 나면 선수도, 부모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거예요. '큰일 났다' '이걸 어쩌냐', 고민도 하고 화도 내긴 하지만 정작 뭘 어째야 하는지 모르는 거죠. 그리고 이게 어디 소문내고 다닐 일도 아니잖아요." 바로 이거다. 감독은 이 문제가 '말 못할 고민'이라는 점을 집중 공략하면서 합의를 유도한다. 그리고는 한마디를 덧붙인다."그래도 아이 운동은 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렇게 어린 피해자의 미래를 인질 삼아 협박성 발언을 양념처럼 살짝 섞어 넣으면 상황은 종료(?)된다. 부모들도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중략

필자가 주목하는 또 다른 공범은 바로 기자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상당수 기자들은 이러한 스포츠계의 성폭력 문제를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를 기사화하지 않는다. 무시무시한 침묵의 카르텔이다. 몇 년 전 농구 아닌 종목의 한 여자 팀 감독의 문제가 터졌으나 이는 기사화 되지 않았다. 이름 꽤나 알려진 이 감독이 선수 가족과는 합의하고 기자들은 '입막음'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기자들은 감독 및 구단과의 '공생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즉 이해관계에 따라 기사화 여부를 판단한다. 좋은 기사거리를 계속 얻기 위해서는 '좋은 관계'가 필수적일 수 밖에 없다.


어퍼컷/정희준지음/2009/미지북스

아서 애시 (Arthur Ashe)

왜 신은 그토록 나쁜 질병을 당신에게 줘야만 했을까?

나는 내가 우승컵을 들었을 때 '왜 나지Why me'라고 절대 묻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내가 오늘 고통을 당한다 해서 '왜 나야'라고 물어선 안 될 것이다. .. 나의 고통에 대해 '왜 나야'라고 묻는다면 내가 받은 은총에 대해서도 '왜 나야'라고 물어야 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기뻣던 순간은 윔블던을 우승했을 때도, US 오픈을 우승했을 때도 아니다.UCLA를 졸업하는 날 할머니에게 졸업 가운을 입혀드렸던 순간이다.
( A HARD ROAD TO GLORY)


운동은 건강과 취미를 위해서 하는 것이지 직업으로는 생각하지 마라.
미국 고교 농구선수가 NBA 선수가 될 확률은 0.0001%이하
변호사나 의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그의 오랜 관심은 인권이었다. 그는 UN본회의에서 인권을 주제로 연설했을 뿐 아니라 남아프리카의 인종 차별 철폐를 위한 항의 시위에도 나섰고, 죽기 얼마 전엔 아이티 난민에 대한 미국의 잔인한 정책에 항의하다가 체포된 경력도 있다. 죽기 전, 그는 에이즈보다 '흑인됨'이 더 고통스러운 것이라면서 "에이즈는 나의 몸을 죽이지만 인종차별은 정신soul을 죽인다고 토로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가 그의 첫 미국 방문 때 가장 먼저 만나길 희망했던 인물도 바로 아서 애시였다.

어퍼컷/정희준 지음/2009/미지북스

http://www.brainyquote.com/quotes/authors/a/arthur_ashe.html

2015년 2월 20일 금요일

스트레이트(straight)와 피처(feature)

스트레이트는 사실 기사이고 피처는 이야기 기사이다.
스트레이트는 객관적으로 있었던 사실을 자초지종과 함께 알려주는 기사다.
이에 비해 피처는 어떤 사실과 사건의 이면에 숨은 스토리를 전해준다.

Multiple-self ,Akrasia, embedded

개인주의적 관점을 가진 경제학 이론은 조직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거나 심지어 무시함으로써 경제적 의사 결정의 현실을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더 심각한 것은 개인주의적 이론이라면서도 개인에 대한 이해마저 그다지 깊지 않다는 사실이다.

분열된 개인: 사람은 '다중 자아'를 가지고 있다

개인주의 경제학자들은 개인이 원자처럼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작은 사회 단위라고 강조한다. 물론 물리적인 의미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철학자, 심리학자는 물론이고 심지어 일부 경제학자까지도 개인이 더 이상 분열될 수 없는 존재인지에 관해 오래전부터 논쟁을 거듭해왔다.
꼭 정신분열증 환자가 아니더라도 한 사람이 자기 안에 서로 상반된 신호를 가지고 있는 일은 흔하다. 이 다중자아 문제는 널리 퍼져 있다. 용어는 익숙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 대부분이 경험해 본 것이다.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도 상황이 달라지면 완전히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집안일을 아내와 나눠서 하는 문제에는 매우 이기적인 남자가 전쟁에 나가서는 전우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희생한다. 이런 현상은 한 사람이 다수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이 남자는 남편과 군인이라는 복수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사람들은 맡은 역할에 따라 기대되는 바도 다르고 행동도 달라지낟.
때로는 의지가 약해서 그럴 수도 있다. 우리는 종종 뭔가를 나중에 하겠다고 결심하지만 정작 그 시간이 되면 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특히 이 문제를 많이 고민했고, 심지어 이 현상을 일컫는 아크라시아(akrasia) 라는 용어까지도 만들었다. 예를 들어 건강하게 생활하겠다고 결심해 놓고는 맛있는 디저트 앞에서 의지가 무너질 때가 많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에 대비해 우리는 '또 다른 나 자신'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방도를 마련해 놓기도 한다. 오디세우스가 사이렌에 홀리지 않도록 배의 돛대에 자기를 묶어 달라고 요청한 것처럼 말이다. 레스토랑에 식사하기 전, 다이어트 중이니 디저트를 먹지 않겠다고 좌중에게 미리 선언해 나중에 체면상 어쩔 수 없이 디저트를 주문하지 않도록 해 본 경험이 독자 여러분에게도 있을 것이다.(집에 가서 초콜릿 쿠키로 보상하면 되니까)

사회에 뿌리박은 개인: 개인은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
다중 자아 문제는 자신이 원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더 쪼개 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다른 개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개인은 원자가 아니다
개인주의 전통을 따르는 경제학자들은 개인의 선호가 어디에서 생겨나는지를 묻지 않고, '독립 의지를 가진' 개인의 내부에서 생겨난 궁극적인 자료로 취급할 뿐이다. 이 개념은 "취향은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De gustibus non est disputandum)." 라는 라틴어 격언에 잘 요약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선호는 가족, 이웃, 교육, 사회적 계급 등등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환경에 크게 영향받아 만들어진다. 성장 배경과 생활 환경이 다르면 소비하는 것이 다를 뿐 아니라 ' 원하는' 것도 다르다. 이런 사회화 socialization 과정이 있기 때문에 개인을 서로에게 분리할 수 있는 원자로 취급할 수 없는 것이다. (멋진 용어를 쓰자면) 개인은 사회에 뿌리박고 (embedded) 있다. 개인이 사회의 산물이라면 " 사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으로서의 남자, 여자, 그리고 가족이 있을 뿐이다." 라고 말한 마거릿 대처 총리는 심각한 오류를 범한것이다. 사회 없이 개인은 있을 수 없다.
1980년대에 방영된 BBC 방송국의 컬트 SF 코미디 <레드 드워프>에서 주인공 데이브 리스터가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와인바에 한번 갔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빈둥거리기 좋아하는 성격이 리버풀 노동자 계급 출신인 리스터는 자기가 한 짓이 무슨 범죄 행위나 된 것처럼 행동했다. (물론 그의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았으면 "계급의 배반자"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영국의 빈곤층 출신 청소년 가운데 일부는 수십년 동안 정부가 대학 진학을 독려하는 정책을 추진했음에도 '유니(uni)'는 자기와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또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성은 과학, 공학, 법학, 경제학 같은 '딱딱한'분야는 자기와 안 맞다고 생각하도록 사회화되어 왔다.
문학광 영화에도 이 문제는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을 바탕으로 영화화된 <마이 페어 레이디>, 윌리 러셀의 연극과 영화<리타 길들이기> ,마르셀 파뇰의 책과 영화<마르셸의 여름> 등은 모두 교육, 그리고  그 결과 경험하게 되는 다른 라이프 스타일로 인해 주인공이 출신 계급과 다르게 변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달라진 주인공은 주변 사람들이 원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예전에 원했던 것과는 다른 것을 원하게 된다.
물론 사람은 자유 의지를 가졌고, 자기와 환경이 같은 사람이 원하고 선택할 만한 것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고, 그렇게 하기도 한다. <리타 길들이기>에서 리타가 대학 학위를 따기로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환경은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할지 선택하는 데 강한 영향을 끼친다. 개인은 그가 속한 사회의 산물이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장하준/김희정 옮김/2014/부키

인간만큼 큰 귀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 스스로 자신의 앎을 창조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중력의 영'은 경험,관습, 도덕, 법률, 법칙 등 다양한 것들 속에 기거하면서 내 자유로운 비상을 가로막았다.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

-니체


2015년 2월 16일 월요일

동물의 임신기간

임신 기간이 가장 긴 동물과 가장 짧은 동물은 무엇일까? 두 동물의 임신 기간은 얼마나 차이가 날까? 임신 기간이 가장 짧은 종은 뾰족뒤쥐(식충목)와 들쥐(설치류)로 20-21일쯤 된다. 반대로 임신 기간이 가장 긴 동물은 코끼리로 22개월이나 된다. 임신 기간이 약 270일인 인간은 중간쯤 되는 셈이다. 종에 따라 임신 주기도 천차만별이다. 들뒤를 포획해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일 년에 연속으로 열두 번 임신을 할 수 있는 데 반해, 코끼리는 4~5년에 한 번씩 새끼를 갖는다.
인간에게 친숙한 가축들의 임신 기간은 어떨까? 암말은 11개월 동안 망아지를 품고, 암소는 9개월 동안 출산을 기다리며, 암양은 5개월 후에 새끼 양을 낳고, 암퇘지는 3개월 3주 3일이 지나야 새끼 돼지를 볼 수 있다. 또한 암말의 경우 쌍둥이를 낳는 경우가 극히 드문 반면 암소는 그런 경우가 좀 더 많고 암양의 경우는 더 많으며 암퇘지는 한 배에 새끼를 무려 열마리 가까이 낳는다. 이 동물들은 야생 상태에 있을 때 육식 동물의 먹잇감이 되는 초식동물이거나 잡식성 동물이다.
그에 비해 육식동물은 임신 기간이 비교적 짧은 것이 특징이다. 개와 고양이, 늑대, 야생 고양이, 그리고 이들과 유사한 야생종들의 임신 기간은 약 2개월 정도이며, 사자와 호랑이같아 몸집이 큰 종들은 3개월이 넘는 100~110일 정도 임신을 유지한다. 한 번에 낳는 새끼의 수도 비슷한 크기의 초식 동물보다 육식 동물이 평균적으로 많다. 육식 동물의 새끼들은 초식동물과 달리 거의 자라지 않는 상태로 태어난다. 육식 동물의 새끼는 눈도 못 뜨고 듣지도 못하며, 털은 아직 없거나 듬성듬성 나 있다. 또한 자신의 몸을 일정한 온도로 유지할 능력도 없으며 엄밀히 말하자면 정온 동물이라고 할 수 없다. 임신 기간이 이처럼 종마다 차이가 나는 이유는 체질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포유류 중에서 가장 큰 고래는 비교적













포유류는 왜 알을 낳지 않을까?/프랑수아 무투/김희경 옮김/민음 in/2006

공생과 기생 그리고 사랑

상대방에게서 받기만 하는 상태를 기생이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이 원초적이고 타산적이며 탐욕스럽기까지 한 상태를 사랑과 혼동한다.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남은 동물들은 기회가 오면 자기만의 보금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렇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얹혀살아야 할 처지에 놓인 개체들은 새로운 여자 주인이나
남자 주인, 또는 어머니나 아버지, 경우에 따라서는 교묘히 먹을 것을 갈취해 낼 이웃을 찾아나선다. 어떻게든 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 하는 것이다.
많은 동물들이 가축으로 남게 된 것은 그런 보호 관계의 절실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남녀 간의 애착이란 위에서 말한 동물들의 행위와 얼마나 흡사한가? 떠돌이 기생 동물들이 집 밖에서 생존하기 어려워 마침내 자멸하는 것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열의 대상을 잃었다는 이유로 자살을 선택하는가?

한편 공생 관계는 기생 관계와 달라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혜택을 얻게 된다. 묵언의 계약에 따라 균형적인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생 관계는 오래 지속되었을 때 파행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공생 관계는 사랑에 있어 필요조건이 된다. 하지만 이 요소가 사랑에 필요한 모든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 성립하려면 필요조건을 넘어선 충분조건이 있어야 한다. 흔치 않는 그 충분조건이란 바로 '당신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이기 때문에'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지극히 비이성적인 이유이다. 이성이 침묵하는 이 문턱에서부터 우리의 탈 프로그램화가 발동하고 행운이 시작된다. 경험하지 않은 자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신비로운 문턱 앞에 서 모든 원칙이 발길을 멈추는 것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동물이 되는가?/미셸세르/ 이수지옮김/민음in/2006

사랑의 관계

유일 무이한 '나'는 또 다른 유일무이한 '나'와 사랑을 나눈다. 그리하여 이들은 매 순간 유일무이한 관계를 만들어 내는데, 이 관계는 각자의 방식에 따라 변화하며 한없이 깊어졌다가 시들어지기도 하고 결국 소멸해 버릴 수도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만 보더라도, 주인공 남녀가 가슴 설레며 사랑을 시작했다가 이내 이별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성 관계를 나누더라도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는 커플도 있을 수 있으며, 그저 자식을 낳고 안정적인 삶을 꾸리기 위해 관계를 유지하는 부부들도 많다.

사랑할 때 우리는 동물이 되는가?/미셸세르/ 이수지옮김/민음in/2006

2015년 2월 14일 토요일

펜실베니아 모라비아 인디언 학살

기독교의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펜실베니아주 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은 모라비아 교도 인디언들은 세 군데의 작은 공동체에 모였는데
그나덴후텐이 그 중심이었다. 백 여명의 인디언들은 전쟁을 피하려 했고 그들은 적대적이지 않았다. 백인의 관습, 장비, 기술을 많이 받아들였으며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는 등
어느 면에서 봐도 17세기 이상에 맞게 개종되고 문명화된 인디언이었다.
그런데 펜실베니아주 의용군이 거기에 도착했고 그들은 무기로 쓸수 있는 모든 걸 가져갔다
연장 도끼 등 공격에 사용될 수 있는 모든 물건을 가져간 후 의용군은 모여서 모두를 죽이기로 했다.대부분 여성과 아이였고 남자라고는 30명 나머지 60명이 여자와 아이였는데 모두 학살당했다. 두명씩 오두막으로 데려와 나무망치로 머리를 쳐 죽였다.
분명히 호전적이지 않았는데도 전혀 상관없이 머리를 부순겁니다.
대학살이 끝나고 의용군은 희열을 느꼈고 그들은 어떤 법적인 처벌도 받지 않았다


Gnadenhutten massacre

http://en.wikipedia.org/wiki/Gnadenhutten_massac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