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명과 억압의 상관관계 ▲ 문명은 억압을 요청한다. |
그럼, 프로이트는 왜 모든 문명은 반드시 억압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한 걸까? <문명은 억압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문장을 <문명은 억압을 요청한다>로 바꿔 쓰고 다시 두 문장으로 고쳐 써 보자. <문명은 억압을 필요로 한다>와 <문명은 억압을 욕망한다>로. 첫 번째 ‘필요’는 수동적 요청이고, 두 번째 ‘욕망’은 능동적 요청이다.
▲ 문명은 억압을 <필요>로 한다.
- 노동과 자연
문명의 억압은 <필요>의 차원에서 고찰된다. 필요(need)란 인간 유기체가 자연(1차 자연으로서의 자연환경과 2차 자연으로서의 현실환경) 속에서 생명활동을 지속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욕구need(자아보존 욕구, 식욕)를 의미한다. 즉, 필요란 <먹고 사는> 문제에 호응하는 식욕과 자기보존 본능으로 표상된다. 필요의 차원에서 <문명은 필연적으로 완전한 욕구충족을 제한해야 한다> 이 필요성, 혹은 필연성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필요의 차원에서 문명은 자연과의 대결 속에서 규정된다. 문명이란 인간 유기체가 자연 환경 속에서 생존을 영위하는 ‘동물적’(자연적: 야생적)이지 않은 방식이다. 프로이트는 그 ‘인간적’ 생존 방식을 ‘노동’과 ‘분배규칙’에서 찾았다.
- 프로이트에 따르면, 문명은 두 가지 기본적인 능력으로 규정되는데, 첫 번째는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 자연의 부를 빼내는 능력>이고, 두 번째는 <인간상호간의 관계를 조정하고 분배의 규칙을 정하는 능력>이다.
첫 번째 규정 속에서 인간문명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시작되었다. 자연과의 투쟁 속에서 인간은 ‘노동’과 노동수단, 즉 ‘도구’를 이용한 기술을 발달시켜, 자연의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자연을 착취하기까지 한다.
두 번째 규정은 첫 번째 규정과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a)생산력의 양은 무한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분배의 문제가 발생하며(희소성) b)노동의 조직과정에서 어떤 인간은 다른 인간의 본능충족을 위한 대상이 되기 마련이고(계급성) c) 자연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인간은 집단생활을 해야 했고 공동생활 속에서 개인은 항상 자신의 욕구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집단성)
- 첫 번째 측면에서 문명은 노동기술의 발달에 따라 자연의 폭력과 희소성으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지지만 두 번째 측면에서 문명은 개개인의 욕구를 억제하는 법과 제도 때문에 자유로부터 멀어져 간다. 이 지점에서 문명의 ‘불만’ 내지 ‘모순’이 발생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이것을 첫 번째, 생산력의 발달에 조응하는 두 번째, 생산관계의 교체를 통해 해소시키지만, 프로이트에게 이 모순은 해소 불가능한 아포리아이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과연 실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모든 문명은 강제와 본능 억제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부분이 정치경제학적 관점으로부터 정신분석이 분리되어 나오는 지점인데, 이에 대한 논의는 잠시 미뤄두자.
- 프로이트에 따르면, 문명은 자연과의 대결에서 결코 완전한 승리를 구가할 수 없기 때문에 욕구불만 역시 완전히 해소될 수 없다. 지진, 폭풍, 홍수, 전염병,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자연의 위협 앞에서 문명은 근본적으로 무력하다. 완전히 길들일 수 없는 자연, “인간은 그것을 운명(아난케Ananke)이라고 부른다.”
“자연의 부를 빼내는 능력”으로서의 노동과 “분배의 규칙”을 요청하는 자연의 희소성(아난케)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프로이트는 물론이고 마르크스주의자들까지 인간(문명)의 본질로서의 노동과 자연의 본질(아난케)로서의 희소성의 대립관계만 파악할 뿐 상호규정성은 놓치고 있다. 인간의 본질로서의 ‘노동’이라는 개념과 자연의 본질로서의 ‘희소성’의 개념은 서구의 인식론적 지평에서 특정한 순간에 상호의존적으로 출현했다.
- 그 두 개념을 출현시킨 인식의 장은 19세기 경제학의 에피스테메이다. 고전주의 시대에 ‘부’를 표상하는 방식과 19세기에 ‘부(가치)’를 이해하는 방식은 전혀 달랐다. 고전주의 시대 중상주의자들에게 ‘희소성’이란 개념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노동과의 관계에서 규정된 게 아니라 “자기가 소유하지 않은 물품의 표상”으로 존재했다. 고전주의 시대에 ‘부’는 교환의 테이블 위에서 ‘필요’가 표상되는 방식 속에서 정의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 표상의 질서가 붕괴된 자리에 인간의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가치’라는 개념이 출현했다.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면서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로 규정되었고, 자연은 ‘불충분함’을 내재하게 되었다. 희소성의 “근저를 이루는 것은 필요도 아니고, 필요의 표상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근본적인 불충분함일 뿐이다. 사실상 노동 - 경제활동 - 이 세계의 역사 속에서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은 인간이 너무 많아져서 토지에서 자연적으로 생산되는 결실의 양만으로는 더 이상 충당되지 않을 때였다.… 따라서 경제를 가능케 하고 필요하게 하는 것은 희소성의 항구적이고 기본적인 사항이다.” 즉, 19세기에 들어와서 가치(부)는 자연에 내재하며 화폐(금)에 의해 표상(교환)되는 게 아니라, 자연의 희소성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 유기체의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 인간(문명)의 노동이 자연의 희소성(need)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프로이트)과 생산력의 발달에 의해 극복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마르쿠제)의 차이는 동일한 에피스테메 속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말싸움에 불과하다. 인간의 노동과 자연의 희소성은 애초부터 같은 (19세기 근대 에피스테메의) 배에서 태어난 쌍생아이다. 자연의 결핍(희소성)은 인간의 노동이 설정되는 순간부터 선험적으로 해소불가능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스탈린식 ‘생산력 주의’의 내적 모순이다.
◆ 득이 되는 문명, 해가 되는 문명
▲ 리비도의 해방
- 마르쿠제 역시 이 <노동가치론>, <생산력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본능충동을 대표하는 에로스와 문명 사이의 불화는 노동의 근본적 필요성이라는 ‘현실원칙’에서 비롯된다. 그에 따르면, “자유로운 리비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노동의 관계와는 적대적이며, 활동력은 노동의 관계를 조직하기 위하여 자유로운 리비도의 관계로부터 물러나야 한다. 만족의 결여만이 노동의 사회적 조직을 유지한다.” “노동의 근본적 필요성”, 즉 문명의 수립과 발달을 위해서는 프로이트가 제기한 ‘현실원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만, 이 현실원칙은 노동의 조직화 방식에 따라 각기 다른 ‘수행원칙’을 추가로 요청하는데, 생산력의 발달은 소외된 노동을 강요하는 억압적 제도를 철폐하도록 추동하고(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 노동시간을 줄여 쾌락을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을 증대시킨다고 한다. 그 마지막 도달점은 완전 자동-기계화를 통한 노동해방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작업시간과 에너지가 최소로 감소된다면 억제의 근거가 사라지고 리비도는 해방된다”
- 노동생산성과 기술의 발달이 그 자체로 쾌락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님은 프로이트 시대 문명비판론자들도 알고 있었다. “여기서 비관적인 목소리가 들린다....거리를 줄이는 철도가 없다면 자식은 애당초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테고, 자식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전화를 놓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대양을 건너는 여행이 도입되지 않았다면 친구는 애당초 항해를 떠나지도 않았을 테고, 친구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전보를 받고 친구에 대한 걱정을 달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청결과 위생이 문명의 특징이라고 했는데, 구강청정제가 없었다면 입냄새는 나지 않았을 것이고, 겨드랑이털 제모제가 없었다면 겨드랑이 털은 혐오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의료기술은 어떤가? “사회들은 그들이 치료할 수 있는 병들만을 허용하며 병리학적으로 정통해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과학과 기술로 새로운 치료법을 수없이 개발해 내는 우리의 문명이 그다지도 많은 질병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아닐까?
- 이것은 프로이트의 말처럼 ‘행복의 주관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욕구(결여)의 사회적 객관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노동(문명)은 자연의 결핍(희소성)을 정복하거나 못하지 않는다. 노동과 노동을 조직하는 ‘수행원칙’, 혹은 ‘사회적 관계 형식’이 결핍(욕구)을 생산하는 것이다.
▲ 문명과 야만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자들까지 포함하여 문명론자들은 한결같이 문명을 야만과 대비시켜 파악했고, 야만인, 혹은 원시인의 경제생활은 자연의 위협과 희소성에 압도되어 먹고사는 문제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야 하는 욕구(결핍)의 경제, 생존의 경제로 보았다. 문명은 노동과 기술을 통해 이로부터 탈출한 상태라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하지만 민족지학자들이 한결같이 보고하는 바에 따르면 소위 원시인들의 생활은 결코 ‘빈곤’하지 않았다. “남아메리카에서는 한결같이 인디인들이 게으르다고 말한다...야노마미족의 경우 하루에 1인당 세 시간의 평균적인 활동을 하면 사회의 모든 필요가 충족된다. 대부분의 원시사회가 그렇다. 하루에 21시간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지내므로 이들의 문명을 오락의 문명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들은 지루해하지 않으며 낮잠, 익살, 논쟁, 마약, 식사, 목욕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
- 자연의 희소성, 삶의 빈곤함은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노동가치론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산물이다. 자본주의는 그 시초부터 원주민들의 자급생활의 수단인 빵나무를 베어내고 그들의 공유지에 울타리를 쳐서 빈곤(결여) 상태로 내 몰았고 그 결여를 극복하기 위해 공장에서 노동력을 판매하는 프롤레타리아가 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가 자랑하는 생산성의 증진은 더 많은 기계의 도입을 가져왔다. 그 기계의 리듬에 맞추면서 ‘생산성이 증대하면 나머지 시간은 놀고먹던’ 사람들은 ‘더 많은 양을 생산하는’ 노동기계로 전락했고, 잉여 노동력은 빈곤의 공포지대, 즉 실업자의 삶으로 밀어 넣었다. 이 산업예비군의 빈곤은 거꾸로 자본가들이 노동력(임금) 시장에서 싼 값으로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했다. 빈곤(결핍)은 ‘잉여’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문명의 산물이다.
출처
정신분석학입문:프로이트 파농 푸코 지젝 탐구 강사 박정수 강의록 제 7강 문명의 영향력과 정신분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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