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6일 목요일

흑인의 불어, 남근/결여의 기표

프란츠 파농은 1927년 프랑스령 앤틸리스(서인도) 제도, 마르티니크 섬의 포르 드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과 프랑스 출신의 백인, 그리고 그들 사이의 혼혈인(뮬라토)으로 구성된 이 프랑스 식민지에서 태어난 인간은 어떤 언어 속으로 태어날까? 대부분의 하층민들은 일상어인 크레올을 사용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중산층은 표준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이러한 이언어적 현실은 프랑스의 식민지 동화정책의 산물이다. 프랑스는 마르티니크 흑인들을 피지배자가 아니라 프랑스 국민으로 인정했고, 프랑스 국민이라면 프랑스어를 훌륭하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유혹했다. 그 유혹에 이끌린 식민지인들은 프랑스 국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일상어인 크레올을 억압해 왔다. 그러나 식민지 동화정책은 문자그대로 실현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식민지에 대한 착취와 차별이 없다면 식민지는 존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민지 동화 정책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라! 라는 공식적인 명령과 식민지 언어(크레올)를 사용하라! 라는 이면의 명령을 동시에 발한다.
- 이런 식민주의의 이중구속 속에서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주체-위치를 결정하는 물신화된 상징이 된다. “불어 구사능력에 따라 백인화의 정도를 평가받는 것이다.”프랑스어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바꾸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소유함으로써 “밀림의 신분”, “원시인”, “흑인”의 존재를 폐기하고 문명화된 백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을 결여된 존재로 인정하고, 불어를 소유함으로써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이 식민화된 소망은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여성이 갖는 남근 선망과 상동적이다. 남근이 결여된 자신의 결여를 인정하고 남근을 가진 남자나 남근의 대리물인 아이를 소유함으로써 결여를 메우고자 하는 것이 여성의 외디푸스 콤플렉스 해소방법이라는 점에서. 식민주의 속에서 내지의 언어(불어)는 남근의 상징이다. 식민주의 속에서 식민지가 여성으로 성별-표상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그러나 식민지인들의 사회-상징적 ‘여성화’는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의 ‘여성화’보다 더 어렵다. 자신의 결여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불어를 완전히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타자가 그의 존재 변이를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소망은 억압된 타자성을 살고 있는 식민지 원주민에 의해, 그리고 자신의 백인화를 인정해 줄 프랑스인들에 의해 좌절된다. 먼저, 식민주의적 욕망의 헛됨을 알고 있는 원주민 아버지의 폭력에 의해 그들의 백인화는 좌절된다. 다음의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사례: “프랑스에서 몇 개월을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한 꼬마가 있었다. 농기구를 보면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저 농기구 이름이 뭐였지요? 그의 아버지가 그 농기구를 그 꼬마의 발등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의 정신이 번쩍 들더니 이내 기억상실증이 사라졌다.”
- 프로이트가 『일상생활의 정신병리』에서 보고하고 있는 ‘망각’의 사례들과 비교해 봄 직하다. 이 신출내기 흑인 유학생의 ‘망각’은 크레올의 ‘억압’에 기인한 것이다. 그것을 간파한 크레올 사용자인 아버지는 “놀라운 방법”으로 그의 단어 망각을 치료해준다. 사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단순하지만 심오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리적으로, 폭력적으로 대면시킨 것은 단지 ‘농기구’의 사물성이 아니다. 그것은 ‘흑인’의 사물성이다. 다행히 풋내기 아들의 억압이 심각하지 않아서 그렇지, 심했다면 자신이 억압한 흑인성과의 이 폭력적 대면은 아들을 정신병으로 몰아갔을 것이다.
다음으로, 불어의 소유를 통한 백인화의 소망은 식민모국의 타자에 의해 좌절된다. 프랑스로 유학을 간 마르티니크 지식인들은 아무리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해도 결코 자신을 백인으로 봐 주지 않는 프랑스인들을 만나게 된다. 까만 피부라는 물질성 앞에 불어의 상징성은 무력하기 그지없다. 일단, 프랑스인들은 흑인을 만나면 마치 어린애한테 말하듯 반말 투의 피진을 사용한다. 기차를 타고 옆자리 승객에게 정확하고 분명하게 "실례합니다. 식당 칸이 어딘지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라고 물어봐도 그들은 여지없이 피진을 사용해서 대답한다. 심지어 앙드레 브레통 같은 진보적인 예술가조차 세자르에 대해 “여기 오늘날 그 어떤 백인들도 감히 구사할 수 없는 정도의 수준으로 불어를 부릴 줄 아는 한 흑인이 있다”라는 식으로밖에 평가하지 못한다.

◆ 불어의 남근적 상징과 흑인의 선망
▲ 남근 기표 = 결여의 기표
불어의 남근적 위력은 식민지 마르티니크 사람들이나 그보다 훨씬 덜 동화된 세자르 흑인들에게나 통할 뿐 정작 프랑스 본국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흑인의 불어는 흑인의 열등감을 더욱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기표가 될 뿐이다. ‘쯧쯧. 저 흑인은 자신의 흑인성을 벗기 위해 얼마나 애썼으면 저렇게도 불어를 잘 할꼬..’ 식민지에서의 남근 기표가 식민모국에서는 결여의 기표로 전도되는 것이다. 왜 이런 전도가 일어나는 걸까? 원래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남근이란 실재의 성기가 아니라 ‘이미 없거나’(여자아이) ‘없어질 수도 있는’(남자 아이) 것으로서만, 즉 결여(부재)의 형식 속에서만 작동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물론,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남근의 기능은 성적 차이를 도입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식민지인에게 불어는 마치 그것을 가지면 백인이 될 수 있을 것처럼 유혹적이지만, 그것은 식민지와 식민지본국의 차이를 도입하기 위한 가상의 미끼일 뿐이다. 그것을 선망하면 할수록, 그것을 소유하면 할수록, 식민지 흑인의 결여는 더욱 선명해진다.
▲ 흑인의 남근-선망과 남근-되기
- 식민화와 외디푸스화의 결합은 성 대상을 선택하는 데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외디푸스화된 식민지 여성은 백인 남성의 남근을 소유함으로써, 백인과 가까운 아이를 소유함으로써 흑인성으로부터 탈출하려 한다. 뮬라토 여성이라면 이런 소망은 더욱 강렬해진다. 그래서 뮬라토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한 흑인 남성은 “‘백인 여성’의 명예를 먹칠했다는” 죄로 법정에 제소를 당해야 한다. 뮬라토 여성에게는 백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남근 선망)과 함께 흑인으로 되돌아 갈 지로 모른다는 공포(거세 공포)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들도 알게 되리라. 백인 남성들은 결코 흑인 여성들과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백인 남자의 아내로서, 백인 아기의 엄마로서 백인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하는 것도 전혀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다. 어차피 백인 사회의 주인은 백인 남성이므로, 식민지 흑인 여성의 외디푸스적 소망(결여를 받아들이고 남근과 아이를 통해 결여를 치유하고자 하는 소망)은 백인 남성의 성적 판타지와 관용에 의해 언제라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게 아닐까?
- 식민지 흑인 남성 역시 “나를 사랑해주는 백인 여성”을 통해 백인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사랑’을 통한 흑인 여성의 백인화 소망과 흑인 남성의 백인화에는 성적 차이가 있다. 흑인 여성은 백인 남성의 사랑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남근을, 혹은 백인 아기를 원하는 데 반해, 흑인 남성은 백인 여성의 사랑을 원하거나 백인 여성의 몸을 정복하고자 한다. “나의 지칠 줄 모르는 손이 그 순백의 젖가슴을 애무하는 순간 백인의 문명과 존엄이 내 손아귀 속에서 내 것으로 화하는 것이다” 그에게 백인 여성은 그 자체로 남근적인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은 “백인 남성처럼 사랑 받는” 것이다. “나를 사랑해주는 백인 여성”, 내 밑에 깔려 있는 백인 여성을 통해 그는 백인 남성과 동일화되기를, 백인 남성의 성적 위치를 차지하고 싶은 것이다. 이 식민주의적 욕망은 동시에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남자아이에게 배당된 욕망이다. 아버지와의 동일시. 흑인 남성의 성적 판타지에서 그가 동일화한 백인 남자는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아버지의 자리에 있다.
- 백인 여성의 몸을 정복함으로써 백인 남성의 자리를 차지하는 성적 판타지는 전형적인 식민지 민족주의의 판타지이다. “약 30여년 전에 석탄처럼 새까만 한 흑인 남자가 파리에서 미친 금발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오르가즘에 도달할 찰라, 그는 갑자기 ‘슐레허 만세’라고 소리쳤다.”) 94년 르완다 사태를 다룬 <호텔 르완다>에서 후투 민병대가 미친 들개처럼 투치족 여성들을 창녀 취급할 때, 거기서도 벨기에 식민모국에 의해 선택받은 투치 여성들에 대한 후투족의 민족주의적 리비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녀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학생출신 노동지도자(독고영재 분)가 시위 한 가운데서 여공(정선경 분)을 후배위로 공격하면서 ‘파쇼 타도!’를 외치는 장면도 유사하다. 사회적 억압에 대한 분노가 여성을 향한 리비도적 공격으로 표출되는 이 장면들에서 피억압 남성들은 억압자에 대한 ‘증오’의 이면에 억압자와 동일화되고 싶은 욕망을 감추지 못한다. 백인남성의 노예였던 흑인 남성들은 백인 여성을 통해 “주인이 되고 싶어한다.”
 -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흑인 지식인은 “나를 사랑해 주는 백인” 여성이 다가와도, 자기 역시 그녀를 사랑해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녀에 대한 사랑에서 “백인여성의 순백한 살결”에 대한 ‘흑인’의 성욕을 발견하고, 그 속에 섞여있는 “수세기에 걸쳐 내 종족에게 가해를 입혔던 백인”에 대한 ‘흑인’의 증오를 읽어내기 때문이다. 그의 ‘포기’는 이중적이다. 백인여성을 향한 사랑의 포기에는 백인남성을 향한 리비도적 증오의 포기가 포개진다. 한마디로, 그의 ‘포기 신경증’은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 ‘흑인성’의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그의 포기신경증은 외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된다. “한때 아주 오래 전에 내가 한 대상과의 관계를 시도했으나 버림받고 말았다는 것 때문이다. 그 대상인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버림받음의 고통, 그것을 내가 당한 만큼 타인에게 되갚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내 복수욕을 재확인하겠다는 것이다.”) 이 부정적-공격(negative aggress) 성향이 백인남성들도 겪는, 따라서 보편적인 유아기 콤플렉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백인남성-백인여성-흑인남성 사이의 인종주의적 삼각관계가 아버지-어머니-아이 사이의 외디푸스적 삼각관계와 동일한 구조, 즉 <권력의 담지자-욕망의 대상-결여된 주체>의 구조를 갖는다는 점에서는 맞다. 하지만 이 구조적 상동성으로부터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보편적으로) 먼저 있고 그것이 성인 사회의 (특수한) 인종주의 콤플렉스로 투사, 반복된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외디푸스 콤플렉스야말로 결여를 중심으로 한 권력과 욕망의 삼각함수를 유아기 가족에 투사한 것이다. 아버지-어머니-아이가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이미 권력과 욕망의 함수관계로 형성된 사회적 신체 위에 등록된 흑인 가족이 있는 것이다.




출처
정신분석학입문:프로이트 파농 푸코 지젝 탐구 강사 박정수 강의록
9강 탈식민주의의 언어적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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