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16일 월요일

공생과 기생 그리고 사랑

상대방에게서 받기만 하는 상태를 기생이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이 원초적이고 타산적이며 탐욕스럽기까지 한 상태를 사랑과 혼동한다.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남은 동물들은 기회가 오면 자기만의 보금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렇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얹혀살아야 할 처지에 놓인 개체들은 새로운 여자 주인이나
남자 주인, 또는 어머니나 아버지, 경우에 따라서는 교묘히 먹을 것을 갈취해 낼 이웃을 찾아나선다. 어떻게든 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 하는 것이다.
많은 동물들이 가축으로 남게 된 것은 그런 보호 관계의 절실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남녀 간의 애착이란 위에서 말한 동물들의 행위와 얼마나 흡사한가? 떠돌이 기생 동물들이 집 밖에서 생존하기 어려워 마침내 자멸하는 것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열의 대상을 잃었다는 이유로 자살을 선택하는가?

한편 공생 관계는 기생 관계와 달라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혜택을 얻게 된다. 묵언의 계약에 따라 균형적인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생 관계는 오래 지속되었을 때 파행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공생 관계는 사랑에 있어 필요조건이 된다. 하지만 이 요소가 사랑에 필요한 모든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 성립하려면 필요조건을 넘어선 충분조건이 있어야 한다. 흔치 않는 그 충분조건이란 바로 '당신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이기 때문에'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지극히 비이성적인 이유이다. 이성이 침묵하는 이 문턱에서부터 우리의 탈 프로그램화가 발동하고 행운이 시작된다. 경험하지 않은 자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신비로운 문턱 앞에 서 모든 원칙이 발길을 멈추는 것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동물이 되는가?/미셸세르/ 이수지옮김/민음in/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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