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은 '우리는 노동계급 일반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만족스런 임금을 받아 가겠다는 자긍심을 찾아볼 수가 없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이 하는 유일한 노력이란 되도록 많이 받고 일로서는 되도록 적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라고 불평했다. 그는 사실 장인에서 노동자로의 변천이 시장의 냉정한 비용-효율 논리로 지나치게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애석해한 것이다. 근대 이전 제작본능(workmanship instinct,인간은 낭비를 싫어하고 생산적인 일을 하려는 본능이 있다는 것) 의 마지막 자취마저 너무도 빨리 사라지고 있음을 . 역설적이게도 , 노동윤리에 호소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공장노동자를 시장논리의 지배로부터 면제시키려던 지난날의 흐름을 은폐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장논리는 노동자들의 성실한 태도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동윤리로 위장한 규율이 권장되었다. 자긍심이나 명예, 의미나 목표따위는 잊어라. 날마다, 한 시간 한 시간을 온힘을 다해 일하라. 노력해야 할 이유를 전혀 모르겠더라도, 노력의 의미를 알 수가 없더라도.
근대화의 개척자들이 맞닥뜨렸던 진정한 문제는, 노동의 목표를 정하고 그 과정을 스스로 제어하면서 자신들이 하는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익숙해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이었다. 그 사람들은 이제 타인이 정하고 감독하는 , 따라서 그 일을 하는 자신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작업에 자신들의 기술과 노동 능력을 사용하도록 바뀌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맹목적인 훈련을 통해 노동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복종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훌륭한 작업 결과에 대해서도 긍지를 갖지 않고, 자신들에게 의미가 사라진 일을 해내야 했다.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가 말했듯이., 새 공장제도는 부분적인 인간을 필요로 했다. 복잡한 기계장치를 구성하는 영혼 없는 작은 부품들'을 상대로 치러졌다. 생산적인 노력과 무관하고, 생산에 배치된 부품들과 불필요하게 마찰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흥미와 욕망을 상대로, 근본적으로 노동윤리는 자유의 포기와 관련된 것이었다.
(...)
올바르고 고상한 품행을 가르치는 다른 윤리적 가르침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윤리는 과거 청산 작업의 건설적 전망이자 처방이었다. 그것은 윤리적 성전의 대상에 해당하는 이들이 지닌 습관과 기호, 또는 욕망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노동윤리는 올바른 행위 형태를 그려냈을 뿐 아니라 윤리 교육의 대상자들이 교육을 받지 않은 채 해 왔을 모든 것들에 의혹을 던졌다. 사람들의 경향은 내버려둘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멋대로 행동하게 하고 그들의 변덕과 기호에 내맡겨 둔다면, 그들은 노력도 하기 전에 굶어죽고, 발전을 고민하기보다 방탕에 빠지게 될 것이며, 멀리 있지만 안정적인 행복보다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유희를 우위에 둘 것이고, 한마디로 말해서 일하기 보다 아무것도 안 하기를 좋아하게 될것이었다. 이 모든 병적이고 방치된 욕구들은 신흥 산업이 맞서 싸우고 결국은 종식시켜야 할 '인습traditon'의 일부였다. 막스 베버가 지적했듯이, 노동윤리는 지나간 현실을 반추하면서'평범한 노동자들의 인습주의'를 '공격하다시피 했다'. 평범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욕구에 대한 고정적인 생각을 떨치지 못해서 여가를 더 좋아하고, 더 열심히 또는 더 오래 일하여 수입을 늘릴 기회를 무시하는 인습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인습주의는 '비난받았다.' 근대라는 아름다운 신세계를 개척하는 이들에게 '인습'이란 물론 모욕이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추잡하고 비난할 만한 경향을 뜻하는 것으로 노동윤리는 그에 맞서 싸워야 했다. 사람들은 어제 손에 넣은 것을 갖고 오늘 만족하려 했고, 일을 더 해야(사실은 비정하고 당혹스러우며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제도와 그 성전에 굴복해야)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더 많은 것'을 피하고 더 좋은 것을 무시하는 습성이 있었다. 노동윤리가 산업사회 이전의 '인습'을 상대로 선포한 전쟁에서 공식적으로 지명된 적들은 표면적으로는 인간적 욕구의 소박함과 인간적 갈망의 평범함이었다. 그러나 실제 전투- 가장 흉포하고 무자비한 싸움-는장래 공장 노동자들의 저항을 상대로 치러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라지도 않았고 이해하지도 못한, 그리고 대부분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지 않았을 노동 방식의 불편함과 당혹스러움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빈곤/지그문트 바우만/이수영 옮김/ 2004/ 천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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