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3일 토요일
미래를 가능성의 장으로 표상하는 것은 확실히 전자본주의 경제에는 낯선 것인데, 이 장에서는 사물을 탐구하고 제어하는 것이 계산에 귀착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너무 자주 오해하는 바와 같이, 농민은 먼 미래를 목표로 할 줄 모른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미래를 수중에 넣으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불신은, 대개 수년에 걸쳐지는 시간의 차원 속에서 좋은 수확을 배분하기 위해 필요한 예견과 항상 공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직접재(매 순간 직접적 만족을 제공할 수 있는 재화로서 농민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들의 생활 안정을 확실히 보증하는 소비재)의 일부분을 미래의 소비를 위해 떼어두는 축적은, 직접적으로 인지된 현재 속에 잠재적으로 숨겨진 <올 것>의 표적을 전제한다. 반대로 그 자체로는 어떤 만족의 원천도 되지 않은 채 직접재의 생산에 협력할 수 있는 간접재의 축적은, 계산에 의해 구성된 <미래>와의 연관하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 전자본주의적 경제 행위는 전통을 구성하는 축적된 모든 경험들에 의해 설정되거나, 경험 속에서 직접적으로 포착된 <올 것>을 지향하게 된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농민은 전년의 전답에서 획득된 소득에 따라 지출하는 것이지, 기대되는 소득에 따라 지출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과잉의 수확이 있을 경우, 농민은 여분의 밀이나 보리를 직접재로 취급하여, 그것들을 파종하여 미래 수확의 희망을 증대시키기보다는 소비를 위해 축적하기를 선호하며, 미래의 소비를 위해 미래의 생산을 희생하는 것이다. 예견의 행동은 기획된 미래의 전망적 표적에 의해 규정되기는 고사하고, 이어받은 모델에 일치시키려는 관심에 따르게 된다.『자본주의의 아비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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