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31일 토요일

니체의 시각에서 대다수가 노예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하여 전적으로 잘못 간주되고, 거의 관찰되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은 일이란 말인가? 개개인의 거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무기력함은 이러한 결여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잘 생각해 보라. 생활양식의 설정 하루일의 할당, 교제를 위한 시간과 선택, 직업과 여가, 명령과 복종,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감각, 식사, 수면, 반성적 사색에서 무엇이 우리에게 바람직하며 무엇이 우리에게 해로운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니체,『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Ⅱ, 224p)

전쟁의 훌륭함

‘너희는 평화를 사랑하되, 또 다른 전쟁의 방편으로서 그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긴 평화보다 짧은 평화를 더 좋아해야 한다.’<전쟁과 전사에 대하여>


훌륭한 명분은 전쟁까지도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고 말하려 하는가? 그러나 나는 말하련다. 훌륭한 전쟁은 모든 명분을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고.’<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015년 1월 30일 금요일

페리클레스 추모 연설

오늘까지 이 연단에 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몰자들에게 조사를 바치는 것을 옳다고 보고, 이 연설의 관례를 법으로 정한 인물을 칭찬해왔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행동으로 나타난 그 명예는 행동으로 표창되면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공중의 손으로 준비된 이 매장행사를 여러분이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과 같이, 다수인의 덕행이 한 개인에게 맡겨져 그 사람의 뛰어나거나 혹은 서툰 연설에 의해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중용을 애기할 때에는 청중들조차 믿기 어려워 하는데, 하나의 주제 아래 완벽하게 연설한다는 것은 어려운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죽은 사람과 친했던 사람, 호감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중용의 연설은, 발표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나 죽은 사람에 관한 자신들의 지식에 비해 뭔가 부족한 인상을 주고, 도 죽은 사람과 교제가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에 대한 연설은 질투심에서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옛 사람들이 이런 관습을 좋은 것으로 인정한 이상, 나도 그법에 따라 되도록이면 여러분의 생각과 희망을 표현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먼저 나는 우리 선조들에 대한 것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이런기회에 조상을 생각하고 그분들께 경의를 표하는 것이 올바르고 또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분들은 이 나라에 대대로 변함없이 상주하고, 그 덕행을 통해서 자유를 현세대에까지 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들이 이런 칭송을 받을 만하다면, 더욱 그에 적합한 것은 우리의 선대 분들 입니다.  요컨대 선대분들은 조상들로부터 전해받은 것 위에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지배권을 애써 쌓아올려 그것을 물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지배권을 손수 돌보고 키운 것은 아직도 여전히 젊음이 넘치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전시나 평시를 가리지 않고 각각의 도시에서 자원을 의존할 수 있도록 모국의 힘을 키운 것도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연설이 지루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지배권을 발전시킨 전적을 일일이 열거하거나, 선조나 혹은 우리가 이어족 및 헬라스인의 침공에 대해 어떻게 과감히 대항했는가를 여기에서 되풀이해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어떠한 생활태도가 우리를 오늘로 인도하고, 어떠한 정체와 정책이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대제국을 이루게 했는지 이러한 점들을 먼저 밝히고 싶습니다.  그런뒤에 이 전몰자들에 대한 찬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점들이 이 단상에서 언급되는 것이 어울릴 뿐만 아니라 시민이든 외인이든 모든 청중에게 유익하리라 나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치체제는 이웃의 관례에 따르지 않고, 남의 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들의 규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 명칭도, 정치 책임이 소수자에게 있지 않고 다수자 사이에 골고루 나뉘어 있기 때문에 democracy 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분규와 관련해서는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며, 이와 동시에 개인의 가치에 따라, 즉 각자가 얻은 성망에 기초하여 계급에 의논하지 않고 능력 본위로 공직자를 선출합니다.  그리고 국가에 뭔가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가난 때문에 이름도 없이 헛되이 죽는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공직에 종사하고, 서로 일상생활에 힘씁니다.  서로 질투에 찬 감시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이웃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든 무례해 보이는 손해행위를 하든, 심지어 명백한 형벌 없이 위해를 가하든 우리는 분노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방치해두지도 않습니다.  악의를 갖고 개인의 일에 간섭치 않고, 두려움을 품고 마땅히 공적인 일에서 법을 어기지 않으며, 언제나 법과 판사를 존중하고, 특히 학대받는 사람을 지키는 법과 모두에게 수치를 가르치는 불문율에 유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많은 기분 전환거리를 강구해 설정해놓았습니다.  국가가 사계절을 통해 경기 대회나 제전을 개최하고, 개인의 유쾌한 주거지는 나날의 노고를 잊게 하고 있습니다.  이 도시의 위대함 때문에 온갖 물건이 빠짐없이 모이고, 그래서 우리 앝네인은 세상 끝의 산물까지도 이 땅의 산물처럼 똑같이 즐기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군사정책도 적과는 다릅니다.  먼저 우리는 문호를 활짝 열고 소위 외인 추방등으로 다른사람의 견문을 방해하지도 않습니다.  설사 이 공개주의 때문에 적이 우리에게서 뭔가를 배워 편의를 도모할지라도 장비나 책략보다 우리의 감투정신을 확고히 믿고 있습니다.  군사교육에 있어서도 그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엄격한 훈련으로 용기의 함양을 추구하고 있지만, 우리는 자유롭게 놔두면서도 그들에 대항해서 조금도 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에를 들어 라케다이몬인은 단독 출병을 하지 않고 모든 동맹군과 상의한 뒤에 우리의 용토에 출병해 옵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 이웃 영토에 침입하거나, 외지에서 본거지를 지키는 자와 싸워 대부분 쉽게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적이든 우리의 전세력에 한 번도 직면해본 적이 없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해군을 증강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육상부대를 각지에 파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군의 일부와 교전해 승리를 얻으면 그 부분적인 승리를 가지고 우리 전체를 격파했다고 소문을 퍼뜨리고, 또 격파당하면 우리의 전세력에 정복되었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훈련이나 군기에 번거롭게 시달리지도 또 서두르지도 않고 태연하며, 용기를 갖고 혼연히 위험에 직면할 뿐만 아니라 다가올 곤경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더욱이 일단 전열에 서면 평소 훈련에 시달리고 있는 자들보다 훨씬 용감하게 행동합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만으로도 우리의 도시는 가히 경탄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지만 또 이것 만이 아닙니다.

즉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사치로 흐르지 않고, 지를 사랑하면서도 유약함에 빠지지 않습니다.  부자는 부를 자랑하지 않고 그것을 활동의 바탕으로 삼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그것을 이겨내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각자 모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최선을 다하고, 전사도 정치에 소홀하지 않으며, 이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공명심이 없다고 보기보다는 쓸모없는 자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 뿐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비판하고 또 동시에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촉진시킵니다.  비판이 실행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렇다고 비판으로만 흘러 해야할 행동을 소홀히 하는 일도 없습니다.  또 다음과 같은 점에서도 우리는 남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목적을 신중히 검토하는 자세와 그것을 과감하게 단행하는 능력을 아울러 지니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남들을 보면 무지가 만용을 불러일으키고, 신중한 생각은 망설이는 태도를 가져옵니다.  공포도 환희도 잘 알고, 게다가 도 위험에 겁을 먹지 않는 자야말로 참된 용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말하는 착한 일도 남들과 달리 은혜를 받는데 있지 ㅇ낳고 그것을 베풀어 친구를 만드는데 있다고 봅니다.  요컨데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선행자는 그 고마워하는 뜻을 잃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점점 더 신뢰받지만, 의리상 은혜를 갚으려는 자는 감사받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에 성의를 잃게 됩니다.  나아가 우리의 또 다른 특질은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해를 따지지 않으며 자유를 신뢰하는데 있습니다.

말하자면 전시가 헬라스의 규범인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시민 한사람 한사람은 독립해서 각각 넓은 분야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즐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장례 때문에 호언장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진실이라는 것은, 이로 인해 우리가 얻은 이 나라의 국력이 실증해주고 있습니다.  즉 시련을 통해 명성을 능가하는 힘을 보여준 것은 오늘날 오직 우리 입니다.  우리에게 패한적도 우리에게만은 한을 품지 않으며, 따르는 속국도 우리 이외에는 그 권력에 적합한 맹주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강력한 증거를 가지고 그 힘을 보여준 우리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미래의 사람들에게도 경탄의 대상이 될것입니다.  사실이 진실을 말한다면 호메로스의 찬가도, 잠시 귀를 즐겁게 하는 멋진 표현도 우리에겐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용기 앞에 굴복한 모든 바다와 육지는 함께 길을 열어 우리를 받아 들였고, 세상 구석구석에 이르기 까지 우리는 성쇠의 기념비를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이토록 위대한 아테네를 위해 이 사람들은 이 도시를 잃어버려서는 안된다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고귀하게 싸우며 죽어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도시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고난을 헤쳐나가는 것이야말로 남은 사람들의 의무인 것입니다.

이 도시에 관해 이토록 길게 이야기한 이유는, 첫째 비교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도시와 우리와의 싸움에서는 그 목적이 자연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이제 말씀드릴 전몰자들에 대한 예찬에 확실한 논거를 부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몰자 에찬의 주된 목적도 이미 달성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찬양한 이 도시를 빛낸 것은 오로지 여기에 잠든 사람들의 수훈이기 때문입니다.  이 수훈과 예찬이 여기에서 산화한 사람들의 경우와 같이 서로 완전히 일치하는 예는 헬라스 어디에서도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편안히 쉬게 될 사람들의 최후는 먼저 그 덕에 명성을 주고, 이어서 그것을 영원히 움직일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조국을 위해 싸운 무용이야말로 사람의 단점을 상쇄한다는 주장은 타당합니다.  요컨대 선행은 악행을 덮어주고, 시민으로서의 장점이 개인으로서의 단점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중 어느 누구도 미래에 지닐 수 있는 부의 쾌락에 마음이 끌려 기가 꺾이거나, 가난한 상태에서 벗어나 잘살 수 있다는 희망에 죽음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 보다는 적에게 복수하길 희구하고, 이것이야말로 생명을 내던질 만한 비길데 없는 영광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들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적을 죽이기로 결심을 굳히고, 부나 쾌락을 초월해 이 결의가 성취되길 기원했던 것입니다.  확실치 않은 전운에 희망을 걸고, 목전에 둔 임무를 자신을 믿고 대담학 수행해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고, 이리하여 퇴각해 생명을 보존하기보다는 대항해 싸우다 죽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불명예스런 이해타산을 피하고 자신의 온몸을 바쳐 전열을 고수한 그들은, 천재일우의 호기를 이용해 공포보다 영광스럽기 짝없는 상태에서 죽어갔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아테네에 어울리는 용사가 되었습니다.  뒤에 남은 사람들의 위험이 보다 적어지길 기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전장에 나서면 이 용사들 못지 않는 대담무쌍함을 보일 각오를 해야만 합니다.  국방의 의의를 말하고, 주지하는 바 보국론을 되풀이해 논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에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나날이 아테네의 힘을 실제로 체험하고 그것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힘이 위대한 것을 느낄때마다, 그것을 획득한 용사들은 전장에서 무엇이 수치스런 일인지 알고 자신의 의무를 깨닫고 비겁하지 않았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깨닫기를 바라는 것은, 이들 용사가 아테네에 준 비길 데 없는 무상의 보물은 설사 시도하다가 실패하더라도 아테네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 한 마음가짐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몸을 나라에 바쳐 불멸의 찬사와 영광 외에 보다 나은 분묘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지하에 묻히고 만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영명은 영원히 기억되고, 일이 있을때마다 사람들의 언동속에서 기념될 것입니다.  요컨대 대지는 모두 영웅들의 묘지가 되어, 모국에서 묘석의 비문에 드러날 뿐만 아니라 아무 관련이 없는 땅에서도 무형무언의 기념비로서 사람들의 마음에 깃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을 모범으로 삼아 자유가 없는 곳에 행복이 없고 용기가 없는 곳에 자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쟁의 위험 앞에서 망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라는 행복조차 지니지 못한 비참한 자가 자기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무엇을 위해 싸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행운도 지나치면 역전되어 큰 변화가 초래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명을 걸고 행복을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긍지있는 인간은 겁을 내고 살면서 수치를 당하기보다 모국을 위해 힘을 다하고 희망에 불타면서 홀연히 죽어가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모인 전몰자의 부모가 되는 여러분께 애도의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보다 나는 위로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갖가지 사건을 경험하며 성인이 된 그들은 지금 저 피안에서 초연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전몰자들처럼 최상의 영광으로 가득 찬 최후를 맞이하고, 여러분이 바치는 것과 같은 애도를 받을 수 있으며, 게다가 그 풍요로운 생애의 종말도 충실했던 사람들이야 말로 행복하다고 말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의 깊은 슬픔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여러분이 예전의 자신들의 기븜을 오늘 이후로는 남들의 손안에서 찾아내야 할때, 여러분은 수없이 그 추억에 슬픔을 느낄 것입니다.  행복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도 쓰라리지 않지만, 오랫동안 익숙했던 행복을 빼앗기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아직 낳을 수 있는 연령에 있는 사람들은 그 대신 태어날 자식에 대한 희망 속에서 견뎌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새로 태어날 자식들은 가정에서는 죽은 자식을 잊게 하는데 도움을 주고, 국가에서는 인구와 방위 양면에서 유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내 자식의 생명을 나라에 바치지 않고 평등과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나이가 든 분들은 행복했던 인생을 인과응보로 보고, 슬픈 날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죽은사람들의 명예에서 마음의 안식처를 찾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명예를 사랑하는 마음만이 늙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도 말했듯이 은퇴연령에 있는 사람은 사리사욕을 따르지 않고 존경받는 데서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여기에 모여 있는 전몰자의 형제나 유자녀 여러분, 내게는 여러분의 장래에 격렬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즉 사람이 죽었을때 그를 칭송하는 것은 세상의 관습이고 공적면에서 여러분은 도저히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없고 약간 손색이 있다고 간주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모두 살아있을동안에는 서로 경쟁의식에서 질투하지만,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에게는 순순히 경의를 표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오늘 이후 미망인이 되는 분들의 부덕에 대해 한마디 언급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짧은 권고에 다 담겨 있습니다.  즉 여성의 본분에서 벗어나지 말며, 좋든 나쁘든 남자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을 무엇보다 긍지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나는 관례대로 해야 할말을 다했고, 여기에 안치된 사람들을 위해 거행되어야 할 의식도 이미 순조롭게 마쳤습니다.  그리고 이 전몰자들과 그 유족에게 나라가 주는 그들에 대한 승리의 관으로서 그들의 자식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의 양육비를 아테네가 국고를 통해 오늘부터 보증합니다.  즉 덕행에 지상의 명예를 주는 나라야말로 가장 훌륭한 시민들이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각자 이곳을 떠나기 전에 연고가 잇는 전몰자들에 대한 한탄을 충분히 풀고 가기 바랍니다.


출처
http://sunnymean.blogspot.kr/2011/12/blog-post.html?view=classic



2015년 1월 27일 화요일

과학에서 해석으로의 이행

 과학에서 해석으로의 이행은 지식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분명 고대(르네상스)적 에피스테메로의 ‘퇴행’이다. 마치 성서와 자연에 숨겨진 신의 뜻을 해석하듯이 꿈의 숨겨진 의미를 해석하려는 것이다. 특히 꿈에 나타난 형상 중에서 원형적 상징이나 관습적 상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고대의 ‘해몽서’ 와의 친연성을 드러낸다. 그 숨겨진 의미가 신이 정한 운명(세계: 객관)에서 꿈을 꾼 당사자의 심리적 과거(주관)로 바뀌었을 뿐 그 해석학적 성격은 같다. 물론, 신체적 생산으로서의 꿈에서 심리적 표상활동으로서의 꿈으로의 ‘퇴행’은 표상으로부터 독립된 사물(생명, 노동, 언어)의 법칙을 다시 인간적 표상의 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탄생한 근대 인간학으로의 ‘진행’ 방향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사물의 질서가 다시 표상화될 때 그 표상은 ‘의식’으로부터 소외된 무의식적의 장소에 자리 잡는다 (푸코,『말과 사물』).

2015년 1월 24일 토요일

게으름뱅이들

그리고 게으름뱅이들이다. 게으름뱅이는 다 귀찮아하는 사람이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무함에도 불구하고 죽지는 않는다. 꺼져가듯이 천천히 소멸하는 것, 이것이 그들이 바라는 것이다.
 진정한 허무주의자는 허무한 데 만족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다. 게으름뱅이들은 허무주의자도 아니며, 해방되지도 못한, 자신의 삶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킬 뿐이다.

니체로 세상보기 강의록/ 조원광

왜소한 인간들, 교양이란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 그토록 불안해하면서도 웃지 않을 수 없었으니! 지금까지 그토록 알록달록한 반점투성이를 본 적이 없었으니!”
“내가 현대인들의 얼굴을 알록달록한 얼룩들로 표현한 것은 제 것도 아닌 지식들을 모아 붙여놓고는 예뻐졌다고 착각하는 현대인들의 위선을 드러내고 싶어서다.”


니체를 공부했다고 해서 니체처럼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니체에 대해 멋있게 이야기를 하며 그것을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는 것이다. 즉, 여러 가지 지식, 교양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도 못하면서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이 바로 그 첫 번째 유형이다.

니체로 세상보기 강의록 / 조원광

멕시코의 에네켄


2015년 1월 23일 금요일

2015년 1월 22일 목요일

“꿈의 압축작용이 가장 분명해지는 것은 그것이 압축하려 하는 대상에 말과 명칭을 선택해 주었기 때문이다. 본래 말이란 꿈에 의해서 사물인 것처럼 취급되며, 그때 말은 사물의 표상과 같은 합성작용을 겪는다.”

2015년 1월 16일 금요일

붓다의 죽음


“아난다여! 내가 입멸한 뒤, 너희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선사의 말씀만 남아 있지, 우리들의 큰 스승은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라고. 그러나 아닌다여! 너희들은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입멸한 후에는 내가 지금까지 너희들에게 설해 왔던 法과 律, 이것이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니라.” 이게 붓다의 마지막 말씀이다.

그런 다음, ‘최초의 선정’으로부터 제2,3,4선정을 지나고 ‘空無邊處’, ‘識無邊處’, ‘無所有處’, ‘非想非非想’, ‘想受滅’를 거치고는 ‘열반’에 들었다. 당연히, 제자들의 슬픔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러자 그 중 한 존자가 이렇게 말한다. “그만두시오, 여러분! 비탄해 하지 마시오. 세존께서는 항상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사랑하고 마음에 맞는 이도 마침내는 달라지는 상태, 별리의 상태, 변화의 상태가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生하고 만들어지고 무너져가는 것. 그 무너져가는 것에 대해, 아무리 무너지지 말라고 해도 그것은 순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라’라고. 여러분! 세존의 몸도 그것은 마찬가지인 것이오.”


미군정 점령관 사령관 존 하지의 회고

한국인은 이 지구상의 어느 족속보다 더 정치적으로 예민하다.
한국사람들만큼 정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한국인들은 식사하려고 두세 명만 모이면 정당을 만들었다.

곪아 터질 때까지 기다리기

한국인들은 어떤 사회적 문제를 직접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빨리빨리 이뤄지는 변화를 통해 그 문제를 건너뛰거나 비교적 사소하게 만드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걸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말이다. 그래서 책임규명에도 소홀할 수밖에 없으며..

민주정치와 파시즘의 경계

민주정치와 파시즘의 경계는 그리 견고하지 않다. 둘 다 민중의 함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보장하지만 개인성을 집단화하고 익명화하는 계기가 주어지면 순간적으로 파시즘으로 변한다. 우리에게는(...) 증오와 질투와 파괴의 죽음 충동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기 산업사회를 지배하는 인터넷도 잘못 쓰이면 파시즘을 낳을 수 있다. 집단성과 익명성은 개인의 의식과 선택을 마비시킨다.
잉여 쾌락의 시대:지젝이 본 후기산업사회/권택영/문예출판사/2003년/63~64쪽

2015년 1월 15일 목요일

『소비의 사회』

◇ 사물은 대체될 수 있는 객관적 기능의 영역 안에서 사물들은 교환 불가능하지만, 이런 명시적 의미denotation의 영역 밖에서 어떤 사물은 다소 무제약적인 방식으로 대체가능하게 된다. 이런 암시적 의미connotation의 영역 안에서는 사물은 기호라는 가치를 띄게 된다. 따라서 세탁기는 도구로서 쓰여지는serve 것과 함께 행복, 위세 등의 요소로서의 역할도 한다play. 바로 이 후자의 영역이 소비의 영역이다. 여기에서는 다른 모든 종류의 사물들이 ‘의미를 표시하는 요소signifying element’로서의 세탁기를 대신할 수 있다.

『구별짓기(La Distinction)』

◇ 대도시에 사는 개인들에게 전형적인 심리적 기반은 신경과민인데, 이는 외적·내적 자극들이 급속도로 그리고 끊임없이 바뀌는 데서 기인한다. (…) 여기서 특히 대도시의 정신적 삶이 어떻게 해서 기분이나 정서적 관계에 더 의존하는 소도시적 삶에 비해 지적 성격을 띠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소도시의 정서적 관계들이 정신의 더 무의식적인 층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꾸준하고 지속적인 습관들을 통해서 가장 잘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우리의 오성은 우리 정신에서도 투명한 층, 즉 가장 상층에 자리 잡고 있다. 오성은 우리의 내적 힘들 중에서 적응력이 가장 뛰어나다. 오성은 대립적으로 변화하는 인상들에 적응하는 데에 어떤 충격도, 내적 동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특수한 생활조건과 관련된 조건의 산물인 이 미적 성향은 동일한 조건의 산물인 모든 사람들을 함께 묶어주는 반면 그 밖의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시켜준다. 그리고 핵심적인 측면에서 구분시켜 준다. 왜냐하면 취향taste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모든 것, 즉 인간과 사물 그리고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를 구분하며,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분된다. 『구별짓기(La Distinction)』

2015년 1월 14일 수요일

「현대 문화에서의 돈」-게오르그 짐멜

◇ "우리는 모든 특정인으로부터 훨씬 더 독립적이다. 바로 이런 관계가 강력한 개인주의를 창출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고립이 아니라 그들과 맺는 관계가, 하지만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를 고려하지 않고 맺는 관계가, 그리고 그들의 익명성과 그들의 개체성에 대한 무관심이, 바로 이 모든것이 사람들을 상호 소외시키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모든 외적인 관계가 인격적인 특성을 지녔던 다른 시기들에 비해서, 오늘날 돈의 존재는 -근대에 대한 우리의 성격 규정에 상응해서- 인간의 객관적인 경제행위가 개인적 색채 및 고유한 자아로부터 더욱더 명확하게 분리될 수 있도록 만든다. 결국 인간의 고유한 자아는 외적인 관계들로부터 물러나서 그 이전의 어느 때보다 더욱더 자신의 가장 내면적인 차원으로 회귀하게 된다.




◇“돈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모든 인격적인 것과 특수한 것을 절대적으로 유보한 채 개인들을 결합시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가르쳐주었다. (…) 따라서 설령 우리가 화폐에 의한 거래가 초래하는 분리와 소외에 대해서 한탄한다고 할지라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돈을 지불하고 그에 대해 필연적인 대가로서 일정하고 구체적인 가치를 받게 됨으로써 돈을 동일한 경제권의 구성원들을 매우 강력하게 연결시킨다. 돈을 직접적으로 소비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실제로 소비하고자 하는 것을 제공해줄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를 연결시켜준다. 따라서 현대인은 고대 게르만 민족의 자유인이나 혹은 그 후의 농노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공급자와 공급원에 의존한다. 그의 존재는 매 순간 돈에 대한 이해관계에 따라 창출된 수백 가지의 결합관계들에 의존한다. 이런 결합관계가 없으면 현대인은 마치 체액의 순환이 차단된 유기체의 일부분처럼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을 것이다.”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1768-1834가 강조한 바에 따르면, 기독교는 경건함, 곧 신에 대한 열망을 인간 영혼의 항구적인 상태로 만든 최초의 종교이다. 이에 반해서 그 이전의 신앙 형식들은 종교적 분위기를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연결시켰다. 마찬가지 이치로, 돈에 대한 열망은 정착된 화폐 경제에서 인간의 영혼이 보여주는 항구적인 상태이다. (…) 신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심층적인 본질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다양성과 대립은 신을 통해서 통일성에 도달하게 되며, 또한 신은, 중세 말기의 저 특기할 만한 근대정신인 니콜라우스 폰 쿠사Nikolaus von Kusa, 1401-64의 멋진 표현을 빌리자면, 모순의 지양-또는 대립의 지양-이라는 사실 말이다. 존재의 모든 낯섦과 화해 불가능성은 신에서 통일성과 화해를 발견한다는 이 이념으로부터 평화, 안전 그리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정도로 풍부한 감정이 유래하는데, 이 감정은 신에 대한 표상 및 우리가 신을 소유한다는 표상과 결부된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돈이 자극하는 감정들은 이것과 심리학적인 유사성을 지닌다. 돈은 점점 더 모든 가치들을 충분하게 표현하는 등가물이 됨으로써 아주 추상적인 높이에서 객체들의 매우 광범위한 다양성을 초월하게 되며, 또한 아주 상반되고, 낯설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들이 자신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상호 접촉하는 중심이 된다. 이렇게 해서 돈은 우리들에게 개별적인 것을 초월하도록 해주며, 돈이 지닌 전능을 마치 하나의 최고 원리가 지니는 전능인 양 신뢰하도록 하는데, 이 원리는 언제든지 개별적이고 비천한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 따라서 돈의 소유가 허락해주는 안정과 평온의 감정, 그리고 돈에서 가치들이 교차한다는 확신은 순수하게 심리학적으로 보면-이른바 형식적으로 보면- 돈이 우리 시대의 신이라는 탄식에 대해 심층적인 근거를 제시해주는 방정식이다.”







「현대 문화에서의 돈」-게오르그 짐멜

2015년 1월 10일 토요일

작은 것을 경멸하는 점

조선인들의 큰 결점 중 하나는 작은 것을 경멸한다는 점이다.
조신인들에겐 자신의 재력과 능력이상으로 뭔가를 시작하는,
매우 어리석고 유해한 결점이 있다.단 한 그루의 과일나무도 돌볼 줄 모르면서
수천 그루의 과일 나무를 가지고 과수원을 시작한다.
거창한 것, 거창한 이름, 거창한 쇼를 선호하는 것이야말로 조선의 상인들과
제조업자들이 실패를 맛본 가장 큰 원인이었다.

(김상태편역, 윤치호 일기 1916~1943: 한 지식인의 내면 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 시기
/ 역사비평사 /2001년/223쪽 )

2015년 1월 7일 수요일

▲ 신을 죽일 수 있다


푸코는 신의 죽음이 인간의 죽음이라 이야기한다. 신이 죽기 위해서는 신앙이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이 죽고 그 자리에 과학이 들어온다면 그것은 결국 모습을 바꾼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죽기 위해서는 신앙이 죽어야 한다. 이는 인간이 전혀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질적인 인간의 죽음이 아닌,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추악함이 아니라 위버멘쉬의 위대함으로 신을 살해하는 일도 가능하다. 차라투스트라가 이해하고 있듯이 그것은 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인간이 위대해지는 일이다.’

신은 보편적 삶의 원칙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원칙들이 스스로 충분히 강해져서 자신의 가치를 강조하면 스스로 신을 죽일 수 있다고 한다.

신은 자신의 피조물이 그토록 추악하다는 사실에 큰 슬픔에 빠지고 마침내는
그 연민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었다

낙타 사자 어린이

낙타는 스스로가 삶을 견뎌야 할 고통으로 생각하고, '삶은 고된 것이다'라고 말하는 착하면서도 인내심이 많은 동물이다. "짐깨나 지는 정신(낙타)은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짊어진다." 그러나 이 낙타로 정신은 만족할 수 없다.
정신은 사자로 변한다. 사자가 된다는 것은 정신이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의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이 사자는 자신이 섬겨온 주인을 찾아 나서며, 마지막 신에게 대적하려 하여, 신의 한 형태인 용과 일전을 벌인다. 마땅히 해야 함을 할 줄 알고, 창조된 모든 가치를 아는 사자,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를 강탈하는 사자가 모르는 것,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사자는 어린 아이의 순진 무구와 망각을 알지 못한다.
"어린 아이는 순진 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공경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http://inmunac-kpipa.or.kr/sub03/sub02_detail/28

2015년 1월 6일 화요일

흑백논리의 관리

작고하신 리영희님은 이분법을 비판하면서 "지난 날보다 더 지혜로워져야 한다. 이제 이분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 상황이 달라지면 지식은 자기수정을 해야한다. 단시일에 바꾸려는 것, 비타협적인 것 , 독선, 과격에서 벗어나야 한다"

2015년 1월 5일 월요일

강자들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속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한 경계심

5. 서바이벌 심리학
참고 작품) 「곰뱀매거진18호」 「조금만 더」
“황병승은 어떠냐 하면, 나는 약자이므로 강자들에게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강자들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속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한 경계심 같은 걸 가끔 드러내 보일 때가 있다. 특히 그런 구절들이 서늘하게 좋다. (…) 황병승의 그런 구절 두어 개 읽어볼까. <그러나 당신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고, 잠시 약해졌을 뿐>(「곰뱀매거진18호」) < 넌 항상 날 인정해줬지/ 넌 항상 인정했어/ 그것은 네가 날 속이고 있다는 감정을 갖게 해>(「조금만 더」) 뭐 이런 식이다. 나는 여기에 ‘서바이벌 심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봤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알아두어야만 하는 심리학 매뉴얼.” _앞의 좌담 중

(한국 현대시의 전위들/ 신형철님의 강의록중에서)

2015년 1월 3일 토요일

안티오디이푸스

◇ 『앙티외디푸스』에는 욕망에 대한 들뢰즈의 이해방식을 보여주는 다음과 두 가지 명제가 있다.
→ 첫째, “욕망은 어떤 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다.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 차라리 욕망에서 없는 것은 주체이다. 욕망은 고정된 주체를 결여하고 있다.”
→ 둘째, “욕망desire은 욕구needs에 의해 떠받쳐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이다. 욕구는 욕망이 생산하는 실재적인 것들 안에서 생기는 반대 산물이다. 결여는 욕망의 반대 효과이다.”
미래를 가능성의 장으로 표상하는 것은 확실히 전자본주의 경제에는 낯선 것인데, 이 장에서는 사물을 탐구하고 제어하는 것이 계산에 귀착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너무 자주 오해하는 바와 같이, 농민은 먼 미래를 목표로 할 줄 모른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미래를 수중에 넣으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불신은, 대개 수년에 걸쳐지는 시간의 차원 속에서 좋은 수확을 배분하기 위해 필요한 예견과 항상 공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직접재(매 순간 직접적 만족을 제공할 수 있는 재화로서 농민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들의 생활 안정을 확실히 보증하는 소비재)의 일부분을 미래의 소비를 위해 떼어두는 축적은, 직접적으로 인지된 현재 속에 잠재적으로 숨겨진 <올 것>의 표적을 전제한다. 반대로 그 자체로는 어떤 만족의 원천도 되지 않은 채 직접재의 생산에 협력할 수 있는 간접재의 축적은, 계산에 의해 구성된 <미래>와의 연관하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 전자본주의적 경제 행위는 전통을 구성하는 축적된 모든 경험들에 의해 설정되거나, 경험 속에서 직접적으로 포착된 <올 것>을 지향하게 된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농민은 전년의 전답에서 획득된 소득에 따라 지출하는 것이지, 기대되는 소득에 따라 지출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과잉의 수확이 있을 경우, 농민은 여분의 밀이나 보리를 직접재로 취급하여, 그것들을 파종하여 미래 수확의 희망을 증대시키기보다는 소비를 위해 축적하기를 선호하며, 미래의 소비를 위해 미래의 생산을 희생하는 것이다. 예견의 행동은 기획된 미래의 전망적 표적에 의해 규정되기는 고사하고, 이어받은 모델에 일치시키려는 관심에 따르게 된다.『자본주의의 아비투스』

생명의 나무

진화 패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다윈에 의해 사다리 모형에서 나무 모형으로 변화됨으로써 우리는 동물원의 침팬지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이해하게 되었고 현시점에서 최고로 잘 적응한 종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고 했던 오만방자함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생명의 나무에서 가지 끝에 있는 모든 종들은 어쨌거나 자신의 서식지에 잘 적응해 살고 있는 성공한 종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화려한 종들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어머니의 어머니로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에는 하나의 공통 조상을 만난다는 사실, 이 얼마나 장엄한 세계관인가 ..

(다윈&페일리/ 장대익/김영사/ 2006, 74쪽)

다윈에 의한 자연선택 조건

1. 모든 생명체는 실제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수의 자손을 낳는다
2.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이라도 저마다 다른 형질을 가진다.(변이조건)
3. 특정형질을 가진 개체가 다른 개체들에 비해 환경에 더 적합하다(적응조건)
4. 그 형질 중 적어도 일부는 자손에게 전달된다.

wolf evolution tree




http://www.dogwalkersmelbourne.com.au/articles-dog-walking-pet-sitting/56-when-and-where-your-dog-evolved-from-the-wolf.html

갈라파고스 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