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일 화요일

Webern Passacaglia, Op. 1




베베른은 1904년 가을부터 쇤베르크(1874~1951)의 제자가 되어 1908년까지 정기적인 레슨을 받았다. 1908년 봄에 작곡된 이 <<파사칼리아>>Op.1는 베베른이 스승의 지도하에 작곡한 마지막 작품으로 그의 졸업작품에 해당하는 것이다. 4년간의 레슨의 성과가 여기에 많이 담겨져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뿐만 아니라 베베른의 독자적인 음악적 특질이라고 할만한 점들도 명확하게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면 아주 간결한 주제. 이 주제는 8개 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으뜸음 외에는 한 음도 반복되지 않으며 가장 높은 음도 반복되지 않는다. 음악의 근본사상(주제)을 괴태의 [근원식물]에 비유한 것은 후일의 베베른인데, 정말로 이 파사칼리아의 주제의 몇 가지 음 중에서는 필요충분한 다양성의 싹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주제의 최초의 세음표(단2도-단3도)와 다음의 세 음표(단3도-단2도)는 서로 자리를 바꾸는 역행을 하고 있다. 이런 음정에의 특별한 기호도 베베른의 전 생애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또 대위법에의 지향. 파사칼리아가 전통적이고엄격한 대위법적 변주곡 형식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뿐만 아니라 이 곡에는 곳곳에서 엄격한 카논 등의 기법이 아주 본질적 의미를 가지고 나타난다. 그 외에 셋잇단음표를 광범위하게 사용한 자유로운 리듬감. 플루트나 뮤트를 붙인 트럼펫 등을 많이 사용한 미묘한 오케스트레이션. 또는 악곡의 기본이 되는 ppp라는 음력의 레벨과 쉼표의 음악적 사용 등은 후일의 베베른 독자적인 양식을 암시하는 듯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베베른다움과 함께, 어떤 습작 냄새나 당시의 음악 상황의 반영라고 볼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습작에 대해서는 작곡자 자신이 이 작품은 직업적 장인의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말했으며 당시 음악적 상황의 반영이라는 점에서는 특히 트리스탄 화음 등을 포함한, 베베른 답지 않은 호화로운 느낌의 화성법에서 쉽게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신빈악파/음악지우사편/음악세계옮김/2002/도서출판 음악세계

2016년 2월 29일 월요일

비슈누

비슈누는 권능을 지닌 다른 신들처럼, 네 개 혹은 그 이상의 팔을 가진다. 오른쪽 한 손에는 우주를 돌리는 바퀴를 지니고 왼손에는 물을 상징하는 소라를 지니고 있다.
오른쪽 또 한 손에 지닌 곤봉은 지식의 힘과 권위를 상징한다.
반인반조의 형상을 한 가루다(독수리)를 타고 다닌다.


나는 비슈누의 위대한 행위를 노래하고자 하노라. 그는 큰 보폭으로 세 걸음을 걸어서, 땅을 구분해내었고, 가장 높은 천상의 거주지를 세웠도다.
이로써 비슈누의 위대한 행위가 찬양을 받노니, 그는 산속에 머물며 사나운 들짐승처럼 이리저리 다니노라. 그의 큰 세 걸음으로 이루어진 영역 속에서 모든 피조물이 지내는도다
산속에 거주하면서, 홀로 큰 세 걸음으로 길고도 아득한 거주지를 만들어낸 ,큰 보폭의 황소, 비슈누 그대에게 이 영감의 노래가 들려지길 바라나이다.
그의 세 발자국 속에 담긴 무한한 꿀로 가득한 제의의 음료로 기뻐하라. 그는 홀로 땅과 하늘과 모든 피조물을 지탱하고 있도다.
사람들이 신들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그곳, 그가 즐기는 안식처에 내가 도달할 수 있을까?
비슈누가 걸어간 가장 높은 그곳, 비슈누 바로 곁에 꿀샘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로다.
우리는 그대 비슈누가 머무는 곳에 가고자 하나이다. 그곳은 피곤을 모르는 곳이며 많은 뿔을 가진 가축들이 있는 곳이로다. 큰 보폭의 황소의 발자국이 있는 지극히 높은 그곳은 밝은 빛이 빛나는 곳이로다.

리그베다 I.154.1~6

베다/이명권/2013/한길사


HYMN CLIV. Viṣṇu

1. I WILL declare the mighty deeds of Viṣṇu, of him who measured out the earthly regions,
Who propped the highest place of congregation, thrice setting down his footstep, widely striding.
2 For this his mighty deed is Viṣṇu lauded, like some wild beast, dread, prowling, mountain-roaming;
He within whose three wide-extended paces all living creatures have their habitation.
3 Let the hymn lift itself as strength to Viṣṇu, the Bull far-striding, dwelling on the mountains,
Him who alone with triple step hath measured this common dwelling-place, long, far extended.
4 Him whose three places that are filled with sweetness, imperishable, joy as it may list them,
Who verily alone upholds the threefold, the earth, the heaven, and all living creatures.
5 May I attain to that his well-loved mansion where men devoted to the Gods are happy.
For there springs, close akin to the Wide-Strider, the well of meath in Viṣṇu's highest footstep.
6 Fain would we go unto your dwelling-places where there are many-horned and nimble oxen,
For mightily, there, shineth down upon us the widely-striding Bull's sublimest mansion.

http://www.sacred-texts.com/hin/rigveda/rv01154.htm

http://www.harekrsna.de/garuda-e.htm

2016년 2월 28일 일요일

카스트 제도의 기원 푸루샤


Purusha (Sanskrit puruṣa, पुरुष)



우리는 베다를 통해 인도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몸을 희생해 우주를 만든 거인 푸루샤의 머리는 하늘로, 눈은 태양으로 , 다리는 땅으로 변하고, 숨결은 바람이 되었다. 푸루샤의 입은 브라만, 팔은 크샤트리아, 다리는 바이샤, 발은 수드라가 되어 네 종류의 사람이 만들어졌다. 이 신화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의 기원이다. 



"푸루샤는 천 개의 머리, 천 개의 눈, 천 개의 발을 가졌다. 사방 온 세계에 편만해 있는 그는 열 개의 손가락을 그 너머로 뻗치고 있다. 

푸루샤는 정녕 이 모든 세계 그 자체이며, 세계로서 존재해왔고 또 존재하게 될 것이다.그는 
(제사)음식을 통하여 탄생시킨 불멸(신들)의 세계를 통치한다.
이것이 푸루샤의 위대성이며, 동시에 푸루샤의 능력은 이것도 넘어선다. 모든 피조물은 푸루샤의 4분의 1에 불과하며 나머지 4분의 3은 하늘에 있는 불멸의 것들이다.
푸루샤의 4분의 3은 위로 올라가고 4분의 1은 여전히 지상에 남는다. 이 지상에서 다시 온 사방으로 뻗쳐 생물(먹는 것)과 무생물(먹지 않는 것)에게 침투한다.
푸루샤로부터 비라즈(viraj)가 탄생되었고, 비라즈로부터 다시 푸루샤가 나왔다. 푸루샤가 탄생될 때, 그는 지구 너머 그 이면까지 뻗쳤다."(리그베다 X 90.1~5)


천수천안 관자재 보살 

우주적 거인 푸루샤의 탄생으로 이제는 푸루샤가 신들을 지배하는 차원으로 격상된다. 불멸의 신들 또한 제사음식을 통해 탄생하는 것으로 묘사됨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다의 세계과 사상은 '음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 음식은 생명을 낳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심지어 음식은 신들까지 탄생시킨다. 음식의 봉헌은 희생제사의 핵심이다.

하필이면 왜 음식일가? 자세히 생각해보면 우주는 온통 먹고 먹힘의 사슬구조이다. 이 구조 속에서 희생제의도 탄생과 재생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런 점에서 앞서 언급한 불의 신 아그니(Agni)는 '먹는 자'요, 술의 신 소마(Soma)는 '먹히는 자'다 . 태양은 삼키고 술은 마셔진다. 마셔지는 음식으로서 소마는 만물을 살리는 생식의 원동력이다.

베다/이명권 지음/2013/한길사

2016년 2월 27일 토요일

인간의 불확실성과 취약성은 모든 정치권력의 기초다.

인간의 불확실성과 취약성은 모든 정치권력의 기초다. 불쾌하지만 인간 조건에 항상 붙어 다니는 이러한 쌍둥이에 대항하고, 이것들이 만들어 내는 공포와 불안에 대항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한 바이다. 그리고 현대 국가가 시민의 복종과 선거에서의 지지뿐 아니라 그 존재 이유를 도출한 것도 대부분 이 약속으로부터이다.
'정상적인' 현대 사회에서 존재의 취약성과 불안, 그리고 심각하고 구제할 길 없는 불확실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살고 행동할 필연성은 악명 높게 변덕스럽고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시장의 힘에 삶의 추구를 노출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시장 자유의 법적 조건을 창출하고 보호하는 과제를 제외하면 정치권력은 불확실성의 생산 및 그 결과 벌어지는 실존적 불안의 확산에 기여할 필요가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

2016년 2월 7일 일요일

민족주의

민족주의 세가지 패러독스
1. 역사가들의 객관적인 눈으로 볼 때 민족들은 근대성을 가진 반면, 민족주의자들의 주관적인 눈으로 볼 때 민족들은 고대성을 지녔다.
2. 근대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그' 혹은 '그녀'로서 성별을 가진 것처럼 국적을 가질 수 있고, '가져야'하고 '가질'것이라는 사회문화적 개념으로서의 국적의 형식적 보편성이 있는 반면에, 정의상'그리스' 국적이 독특한 것처럼 민족주의의 구체적 표현에 있어서 바꿀 수 없는 특수성이 있다.
3. 민족주의가 '정치적'으로는 위력이 있는 반면 철학적으로는 그 내용이 빈곤하고 일관성마저 결여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대다수의 다른 주의들(isms)과는 달리 민족주의는 자신의 대사상가를 배출해내지 못했다. 민족주의 사상가 중에는 홉스, 토크빌, 맑스, 베버와 같은 사상가들이 없다. 이러한 사상적 '공허함'이 세계주의적이고 다양한 언어에 능통한 지성인들 사이에 쉽게 일종의 겸양을 일으킨다.



(...)우리가 민족주의를 자유주의나 전체주의 보다는 친족이나 종교와 연관되는 것으로 취급해졌으면 문제는 더 쉬워졌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인류학적 정신에서 다음과 같은 민족의 정의를 제안한다. 즉 민족은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이다.
민족은 가장 작은 민족의 성원들도 대부분의 자기 동료들을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며 심지어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지만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서로의 친교의 이미지가 살아있기 때문에 상상된 것이다. 르낭이 "민족의 핵심은 전 소속원들이 많은 것을 공유한다는 사실이며, 동시에 전 소속원들이 많은 것을 망각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민족은 제한된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10억의 인구를 가진 가장 큰 민족도 비록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한정된 경계를 가지고 있어 그너머에는 다른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민족도 그 자신을 인류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어떤 구세주적 민족주의자들도 기독교도들이 어느 시대에 기독교도만 모인 행성이 도래할 것이라고 꿈꾸는 것과 같이 모든 인류의 성원이 그들의 민족에 동참하는 날이 올 것을 꿈꾸지는 않는다.
 민족은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계몽사상과 혁명이 신이 정한 계층적 왕국의 합법성을 무너뜨리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어떤 보편적인 종교의 가장 신앙심 깊은 추종자라도 보편적인 종교들이 여러 존재한다는 사실과, 각 신앙의 존재론적 주장과 영토적 한계 사이에 이질동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런 인간의 역사 단계애서 민족들은 자유롭기를 꿈꾸며 만일 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면, 직접 받기를 꿈꿈다. 이 자유의 표식과 상징은 주권 국가이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각 민족에 보편화되어 있을지 모르는 실질적인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의식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지난 2세기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제한된 상상체들을 위해 남을 죽이기보다 스스로 기꺼이 죽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형제애이다.
 이러한 죽음은 우리를 민족주의가 제기하는 핵심적인 문제에 갑자기 직면하게 한다. 무엇이 (겨우 2세기 정도밖에 안되는) 근대 역사의 축소된 상상체들로 하여금 그렇게 대량의 희생을 낳게 하는가? 나는 이 대답의 시작이 민족주의의 문화적 근원에 놓여있다고 믿는다.


오늘날에는 왕국이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 체제인 세계 속으로 자기 자신을 이입해 보는 일이 어렵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진정한 군주제는 정치생활에 대한 모든 근대적 개념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왕권은 모든 것을 중앙 중심적으로 조직한다.왕권의 정통성은 주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서 나온다. 주민은 시민(citizens)이 아니고 백성(subjects)일 뿐이다.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베네딕트 앤더슨 저/ 윤형숙 역/ 나남/2002년 6월 )

2015년 12월 14일 월요일

광장에서 시장으로

민주주의는 아고라 ,곧 광장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형식이다. 아고라는 폴리스의 다른 두 영역인 에클레시아와 오이코스를 연결하고 동시에 분리하는 매개 공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에서 오이코스는 가족공간을 의미하며, 그 안에서 사적 이익이 형성되고 추구되는 장소를 말한다. 반면 에클레시아는 '공적' 공간을 의미하며, 선출이나 지명, 또는 추첨에 의해 정해진 정무관으로 구성된 민회를 뜻한다. 그 기능은 폴리스의 모든 시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동의 관심사인 전쟁과 평화, 국토 방어, 그리고 도시 국가에 속한 시민의 공동생활을 지배하는 규칙 같은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에클레시아의 어원은 '부르다' ' 소집하다' '모으다'라는 의미의 동사 kalein으로 이 개념은 처음부터 아고라의 존재를 상정했다. 아고라는 모여서 이야기하는 곳 ,시민과 민회가 만나는 곳으로, 민주주의의 장소였다.

(...)그러므로 한 정치 체제의 민주주의적 성숙도는 이러한 번역의 성공과 실패, 매끄러움과 거칢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즉 그 주된 목적을 달성한 정도에 의해 측정되어야지, 종종 민주주의(모든 민주주의, 민주주의 자체)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오인되곤 하는 이러저러한 절차의 완고한 준수 여부에 의해 측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단 대중 투표가 통치자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유일하게 수용 가능한 지표가 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간접 참여의 효율은 종종 논쟁거리가 되곤 했다. 공연한 반대나 공개 토론을 용인하지 않는 명백한 권위주의적, 전체적, 전체주의적, 폭압적 체제가 의사 표현의 자유를 신중하게 존중하고 보호하는 체제보다 더 높은 투표율(따라서 형식적 기준에 따르면, 통치자의 정책에 대한 더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 후자의 체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투표율을 쉽사리 자랑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가 출연하는 초기단계, 이른바 자본의 ' 원시 축적'단계는 심각한 분노를 표출하는 미증유의 사회 격변, 생계 수단의 강탈, 그리고 생활 조건의 양극화 같은 특징을 예외없이 드러낸다는 점을 기억하자. 이러한 특징들은 그 희생자들에게 충격을 주면서 폭발의 잠재력을 내포한 사회적 긴장을 창출할 수밖에 없으며, 신흥 사업가와 상인은 강력하고 무자비하고 위압적인 독재 체제를 등에 업고 이러한 긴장을 억눌러야 한다. 그리고 전후 일본과 독일의 '경제 기적'에서 상당 부분은, 토착 정치 기관으로부터 국가 권력의 강제/ 억압 기능은 넘겨받은 반면 피점령국의 민주주의 제도에 의한 통제는 효과적으로 회피한 외국 점령군의 존재 덕분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을 첨언한다.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민주적 권리의 형식적 보편성과 권리 보유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의 비보편성 사이의 모순은 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악명 높은 약점 가운데 하나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법률상의 시민'의 법적 조건과 '사실상의 시민'의 실제 역량을 나누는 간격, 개인이 자기 기술과 자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이러한 기술과 자원이 없다)을 동원해서 매울 것으로 기대되는 간격이다.
(...)선택의 자유는 결국 계산할 수 없는 무수한 실패의 위험을 수반하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능력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빠져 이러한 위험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더 많은 이들은, 실패의 두려움이 공동체의 이름으로 발급된 보험 증권(개인적 실패나 불의의 재난에 처했을 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증권)에 의해 완화되지 않는 한, 선택의 자유라는 자유주의의 이상을 형체 없는 유령이나 헛된 꿈으로 여길 것이다.

만약 민주적 권리와, 그 권리에 수반하는 자유가 이론상으로는 부여되지만 실제로는 획득될 수 없다면, 절망의 고통보다는 불운의 수모가 확실히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나날이 시험받는 , 삶의 도전에 대처하는 능력은 결국 개개인의 자신감과 자부심을 투사하거나 용해하는 작업장이다. 사회 국가가 아닌 정치 국가, 사회 국가가 되기를 거부하는 정치 국가에서는 개인적 나태와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다. 만인을 위한 사회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마 갈수록 많은 사람이 자신의 정치권이 쓸모없거나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정치권이 사회권을 제자리에 놓이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사회권은 정치권을 '현실적인' 존재로 자리 잡고 계속 작동하게 하는 데 불가결한 것이다. 정치권과 사회권은 자기 존속을 위해 상대방을 필요로 하며, 이러한 존속은 공동의 성취일 수 밖에 없다.
 *사회국가라는 명칭은 강조의 초점을 물질적 이득의 분배에서, 물질적 이득의 제공을 통해 공동체 건설을 추진한다는 동기로 이동시킨다.

(...)

약 60년 전 T.H 마셜은 당시 유행하던 사조를 재구성해서 시간을 초월한 인류 진보의 보편 법칙을 자신 있게 내놓았다. 그것은 재산권에서 정치권으로, 그다음 사회권으로 나아가는 진보였다. 그가 볼 때 정치적 자유는 경제적 자유의 불가피한 , 심지어 다소 지연된 산물이었다. 한편 정치적 자유는 필연적으로 사회권을 낳았고, 그에 따라 두가지 자유를 모든 사람이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마셜은 정치권이 잇달아 확대되는 데 발맞추어, 아고라는 수용 인원을 더 늘리고 이전에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부류의 사람들에게 차츰차츰 발언권이 주어지고 불평등이 점점 줄어들고 차별이 갈수록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약 25년 후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마셜의 예측을 대놓고 반박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수정해야 할 또 다른 규칙성을 포착했다. 즉 사회권의 보편화가 결실을 거두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많은 정치권 보유자들이 개인적 이익을 위한 안건을 지지하는 데 투표권을 행사하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 소득이나 생활 수준, 삶의 전망에 관한 불평등이 줄어들거나 없어지기는커녕 더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갤브레이스는 이러한 추세가 새롭게 등장한 '만족하는 다수파'
가 드러내는 이전과 확실히 다른 풍조와 인생철학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위험이 큰 반면 기회도 풍부한 세계에서 확고히 주류의 자리를 차지한 신흥 다수파는 '복지 국가'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복지 국가는 안전망이기보다는 감옥이었고, 기회이기보다는 제약이었다. 또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전 세계를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는 그들의 입장에서 복지 국가는 결코 필요할 리도 없고 이득을 볼 성싶지도 않은 낭비에 불과했다. 그들이 보기에 한자리에 붙박인 일국의 빈민은 더는 '노동 예비군'(현역으로 다시 동원될 때를 대비해 예비군의 전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고, 빈민층을 돕는 데 돈을 쓰는 것은 낭비에 불과했다. 마셜이 '인권의 역사적 논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할 지점으로 생각한 사회 국가에 대한 '좌우를 넘어선' 광범위한 지지는 점점 더 빠르게 줄어들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복지 국가에 대한 재정 지원이 부족해지고 붕괴되며, 심지어 적극적으로 폐지되는 것은 자본주의 이윤의 원천이 공장 노동자의 착취에서 소비자의 착취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또한 소비 시장의 유혹에 대응하는 데 필요한 자원이 없는 빈민에게는, 소비 자본의 관점에서 본'유용함'을 증명하는 현금과 신용 계좌('복지국가'가 제공하는 종류의 서비스가 아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복지국가는 오늘날의 '사류화(私類化)' 조류( 소비 시장의 본질적으로 반공동체적이고 개인화된 생활 유형, 사람들을 타인과의 경쟁에 몰아넣는 생활 유형)를 꼭 집어 방지하기 위해 고안되고 장려된 듯한 기획이었다. 사유화 조류는 사람들 사이 유대의 그물을 약화시키고 붕괴시킴으로써 인적 연대의 사회적 기초를 잠식하는 것이었다. '사유화'는 사회적으로 생산된 문제들에 맞서 싸워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벅찬 과제를,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목적에 맞는 자원이 부족한 개인들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반면 사회 국가는 무자비하고 부도덕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에서 희생자를 내지 않기 위해 구성원들을 단결시키는 성향을 띤다.

(...)

그렇지만 지금 우리(세계 시장, 국제 통화 기금, 세계은행의 일치된 압력을 받는' 개발 도상국'의 '우리'뿐 아니라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선진국'의 '우리')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현실적인 것이든 상상된 것이든 '총체성'과 사회와 공동체는 점차 '공허하게' 되어 간다. 개인적 자율성의 범위는 확대되고 있지만, 동시에 과거에는 국가의 책임으로 여겨졌던 기능이 지금은 개인적 고려 사항으로 ('자회사'로 분할되듯이) 이전되었다. 국가는 단체 보험 증서에 대한 보증에 열의가 없으며 갈수록 많은 유보 조항을 달게 되고 , 안전한 복지의 추구는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

(...)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길이와 밀도가 급속히 늘어나는 '정보 고속 도로'의 네트워크 덕분에, 모든 개인은 자기 몫을 모든 다른 개인, 특히 공적 우상(텔레비전과 타블로이드 신문, 그리고 대중 잡지 전면에 등장하여 끊임없이 각광을 받는 유명 인사들)의 몫과 비교하라는, 그리고 삶의 가치를 겉으로 드러나는 부에 의해 측정하라는 권유와 유혹과 설득, 더 나아가 강제를 받게 된다. 이와 동시에 만족스러운 삶의 현실적 전망은 급격히 분산되지만 , 사람들이 꿈꾸고 갈망하는 '행복한 삶'의 기준과 증표는 수렴되는 경향을 띤다. 사람들이 행동하는 원동력은 이제 '옆 사람을 따라잡는다'라는 어느 정도의 현실적 욕구가 아니라 '유명 인사를 따라잡는다.' 즉 슈퍼모델, 프리미어리그 축구 선수, 상위 10대 가수를 따라잡는다는 지독하게 허구적인 생각이다. 올리버 제임스의 말대로, 이런 유해한 심리는 "비현실적인 열망, 그리고 그것이 충족될 수 있다는 기대"를 조장한 탓에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수의 영국인은 자신이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으며","1970년대 이후 실현 가능성이 줄어들었음에도 누구든 앨런 슈거나 빌 게이츠가 될 수 있다고 믿고"있다.
오늘날의 국가가 국민에게 실존적 안전("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즉 루스벨트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는 '굳건한 신념'을 피력하며 사용한 문구)을 약속할 수 잇는 가능성과 의지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부수적 피해/지그문트 바우먼/정일준 옮김/2011/민음사














2015년 6월 18일 목요일

집착의 경

1.이와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2. 그 때 싸밧티 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즐기면서 탐내고 그것에 묶여서 정신을 잃고 애책하여 취한 상태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 속에서 지냈다.
3.많은 수행승들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싸밧티 시에 탁발하러 들어갔다. 싸밧티 시에서 탁발하여 식사를 마친 뒤, 탁발에서 돌아와 세존께서 계신 곳을 찾아왔다.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한쪽으로 물러나 앉아서 그 수행승들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여기 싸밧티 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즐기면서 탐내고 그것에 묶여서 정신을 잃고 애착하여 취한 상태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4.그러자 세존께서는 그 뜻을 헤아려, 때맞춰 이와 같은 감흥어린 시구를 읊었다.

"욕망에 집착하는 자들은
욕망에 의한 염착에 묶여
결박들 속에서 잘못을 보지 못하니
분명히 결박의 염착에 사로잡혀
광대하고 커다란 거센 흐름을 건너지 못하리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2.그 때 싸밧티 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집착하여 즐기면서 탐내고 그것에 묶여서 정신을 잃고 애착하여 눈이 멀고 취한 상태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 속에서 지냈다.
3. 한 때 세존께서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싸밧티 시에 탁발하러 들어갔다. 마침 세존께서는 싸밧티 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집착하여 즐기면서 탐내고 그것에 묶여서 정신을 잃고 애착하여 눈이 멀고 취한 상태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 속에서 지내는 것을 보았다.
4. 그러자 세존께서는 그 뜻을 헤아려, 때맞춰 이와 같은 감흥어린 시구를 읊었다.
[세존]
"어망의 입구에 있는 물고기처럼
 욕망에 눈멀고 그물에 덮여
 갈애의 덮개로 갇히고 방일의 친척에 묶여
 젖먹이 송아지가 어미를 향하듯,
 사람들은 늙음과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우다나-감흥어린 시구/전재성 역주/ 2009/ 한국빠알리성전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