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7일 일요일

민족주의

민족주의 세가지 패러독스
1. 역사가들의 객관적인 눈으로 볼 때 민족들은 근대성을 가진 반면, 민족주의자들의 주관적인 눈으로 볼 때 민족들은 고대성을 지녔다.
2. 근대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그' 혹은 '그녀'로서 성별을 가진 것처럼 국적을 가질 수 있고, '가져야'하고 '가질'것이라는 사회문화적 개념으로서의 국적의 형식적 보편성이 있는 반면에, 정의상'그리스' 국적이 독특한 것처럼 민족주의의 구체적 표현에 있어서 바꿀 수 없는 특수성이 있다.
3. 민족주의가 '정치적'으로는 위력이 있는 반면 철학적으로는 그 내용이 빈곤하고 일관성마저 결여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대다수의 다른 주의들(isms)과는 달리 민족주의는 자신의 대사상가를 배출해내지 못했다. 민족주의 사상가 중에는 홉스, 토크빌, 맑스, 베버와 같은 사상가들이 없다. 이러한 사상적 '공허함'이 세계주의적이고 다양한 언어에 능통한 지성인들 사이에 쉽게 일종의 겸양을 일으킨다.



(...)우리가 민족주의를 자유주의나 전체주의 보다는 친족이나 종교와 연관되는 것으로 취급해졌으면 문제는 더 쉬워졌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인류학적 정신에서 다음과 같은 민족의 정의를 제안한다. 즉 민족은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이다.
민족은 가장 작은 민족의 성원들도 대부분의 자기 동료들을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며 심지어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지만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서로의 친교의 이미지가 살아있기 때문에 상상된 것이다. 르낭이 "민족의 핵심은 전 소속원들이 많은 것을 공유한다는 사실이며, 동시에 전 소속원들이 많은 것을 망각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민족은 제한된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10억의 인구를 가진 가장 큰 민족도 비록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한정된 경계를 가지고 있어 그너머에는 다른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민족도 그 자신을 인류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어떤 구세주적 민족주의자들도 기독교도들이 어느 시대에 기독교도만 모인 행성이 도래할 것이라고 꿈꾸는 것과 같이 모든 인류의 성원이 그들의 민족에 동참하는 날이 올 것을 꿈꾸지는 않는다.
 민족은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계몽사상과 혁명이 신이 정한 계층적 왕국의 합법성을 무너뜨리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어떤 보편적인 종교의 가장 신앙심 깊은 추종자라도 보편적인 종교들이 여러 존재한다는 사실과, 각 신앙의 존재론적 주장과 영토적 한계 사이에 이질동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런 인간의 역사 단계애서 민족들은 자유롭기를 꿈꾸며 만일 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면, 직접 받기를 꿈꿈다. 이 자유의 표식과 상징은 주권 국가이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각 민족에 보편화되어 있을지 모르는 실질적인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의식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지난 2세기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제한된 상상체들을 위해 남을 죽이기보다 스스로 기꺼이 죽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형제애이다.
 이러한 죽음은 우리를 민족주의가 제기하는 핵심적인 문제에 갑자기 직면하게 한다. 무엇이 (겨우 2세기 정도밖에 안되는) 근대 역사의 축소된 상상체들로 하여금 그렇게 대량의 희생을 낳게 하는가? 나는 이 대답의 시작이 민족주의의 문화적 근원에 놓여있다고 믿는다.


오늘날에는 왕국이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 체제인 세계 속으로 자기 자신을 이입해 보는 일이 어렵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진정한 군주제는 정치생활에 대한 모든 근대적 개념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왕권은 모든 것을 중앙 중심적으로 조직한다.왕권의 정통성은 주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서 나온다. 주민은 시민(citizens)이 아니고 백성(subjects)일 뿐이다.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베네딕트 앤더슨 저/ 윤형숙 역/ 나남/2002년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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