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29일 금요일

인간

절망의 또 다른 이유는 인간에 대한 실망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살아간다는 일이 사람에 대해 실망하고 사람에 대한 끊임없는 불신을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조직을 떠나고 정치적 의지와 목적을 상실한 이후, 내가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배우고 터득한 것은 섭섭, 씁쓸, 실망, 유감, 허탈, 원망, 미움, 증오 , 배신 , 배반 , 회한, 배타, 조롱, 경멸, 결별, 적대 , 간사 ,위선, 비겁 같은 단어들이었다, 비단 국회에서 만났던 정치인들뿐만이 아니었다.
1990년대 초반에 많은 운동권 선후배들이 정치권으로 유입되었는데, 속된 말로 '민주 양아치'라고 불릴 만한 행태를 서슴지 않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마르크스주의가 사라진 자리에 마키아벨리즘만 횡행하는 풍경을 목도하면서 '사람이란 무엇인가?' 라는 회의가 들어 괴로웠다. 물론 완전한 사람은 없다. 20세기식 역사에 대한 낙관과 혁명을 생각했을 때 동경했던 영웅적인 지도자나, 아니면 유령처럼 배회하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버지였던 니체가 꿈꾸었던 초인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주변사람들을 둘러봐도 한결같이 뒤가 깨끗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절대적 선, 절대적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남산 안기부에서 나 스스로에게 실망한 뒤 인간 일반에 대한 불신만 커지던 시기였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나온 주인공 염상진의 설법을 동원하며 자위해 보기도 했다. 빨치산들의 몰염치한 행동을 보고 실망하는 어느 대원에게 염상진은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빨치산은 완전한 인간들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세상을 가꾸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의 진보운동이 값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나를 겨우 버텨내는 자위용 문구였을 뿐이었다. 부실한 부품소재로 어찌 최첨단 제품을 만들 수 있겠는가. 그것이 굳이 사회주의라는 이름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역사적 진보에 대한 희망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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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도 지쳤지만 현실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환멸감 역시 점점 커져갔다. 1년여동안 겪은 여의도 정치판은 토지의 지력을 높여 소출을 얻기보다는 적당한 이미지 연출을 통해 '표'라는 열매만을 따먹는 몰염치한 농사일처럼 느껴졌다.
어떤 정치인은 국정감사 때 휴게실에서 바둑이나 두다가도 방송카메라가 오면 국감장에 나와서 열심히 일하는 척해서 좋은 이미지로만 국민에게 비쳐졌고, 화려한 언변으로 여기저기서 멋있게 폼을 잡던 사람이 뒤로는 저급한 정치형태를 서슴지 않았다. 그런 형태를 바로 옆에서 보면서 역겨워서 신물이 날 정도였다. 이래 가지고 정치가 역사의 변화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는 회의를 떨칠 수 없었다.
(...)한국 정당정치로는 역사의 진보와 개혁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담금질-안희정의 새로운 시작/안희정/2008/나남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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