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8일 토요일

정서성

정서성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는 특성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정서성이 높은 사람들은 신체적 위험에 처하는 것에 무서움을 많이 느끼고 그 상황을 회피하려 합니다. 이들은 자신과 가족의 신체적 안녕에 대해 많이 걱정합니다. 이들은 곤경에 처했을 때 타인의 정신적 물질적 도움과 자원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친한 친구나 가족에 대한 정서적 유대감과 애착이 아주 강합니다.
정서성에 내재해 있는 자신과 가족에 대한 보존 욕구는 여러 방식으로 나타나빈다. 정서성이 높은 사람은 심리학자들이 개념화한 '분리불안장애'를 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장애는 주로 아이들에게서 나타나지만 어른들에게서도 종종 보입니다. 예컨데 어떤 사람들은 배우자나 아이들이 단 하룻밤이라도 떨어져 지내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거의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위험한 일을 강박적으로 상상해서 자신을 괴롭힙니다.
이들은 여러 공포 증상을 발전시키기도 합니다. 동물, 피 , 주사, 충돌, 추락, 폐쇄 따위의 여러 물리적 위험에 대해 강렬한 공포를 느끼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

앞서 기술한 대로 정서성이 높은 사람은 가족과 친지에 대한 강한 정서적 애착을 나타내고, 이것은 그들에 대한 이타성을 증진시킵니다. 바꾸어 말하면 정서성이 높은 사람은 진화생물학자들이 말하는 친족이타성이 높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정서성, 즉 친족 이타성이 매우 높을 뿐 아니라 상호 이타성을 나타내는 성격 요인인 정직성과 원만성도 모두 높은 사람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이 사람은 남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한량없이 주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 세 차원에서 모두 낮은 사람들은 인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아주 고약한 사람들이겠지요


H펙터의 심리학/이기범,마이클 애쉬튼 지음/2013/문예출판사



교활하게 울고 보채는 '낮은 정직성-높은 정서성' 유형

정직성과 정서성이 둘 다 낮은 사람에 비해서 정직성은 낮고 정서성은 높은 사람들은 그다지 위험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겁이 많아서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한 모험 행동을 꺼려하는 편이지요. 그리고 이들은 정 때문에 사람들을 완전히 매정하게 내몰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성격 프로필을 가진 사람들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들도 남을 이용하려 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남과 싸워서 생기는 위험은 피하고 싶어 하므로 남들이 잘 눈치채지 못하는 미묘한 방식으로 타인을 이용합니다. 즉 정직성도 낮고 정서성도 낮은 사람들은 남과 싸울 때 절대 기죽을 사람이 아닌 반면, 정직성은 낮지만 정서성은 높은 사람들은 이런 경우 슬슬 발뺌을 하려 할 것입니다. 이들이 행동하는 걸 보면, 아마 교활한 여우나 겁쟁이란 말이 떠오를 것입니다.(이 성격 프로필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영웅' 이미지와 정반대지요. 영웅들은 언제나 정직성이 높고 정서성이 낮은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예컨데 전형적인 액션 영화의 주인공, 말하자면 경찰관이나 스파이는 언제나 터프하고 용감하며 정의를 위해 싸웁니다. 이들은 그렇게 다정다감하지는 않지만 절대 부패에 빠지지 않고 정의롭게만 행동합니다)
또한 정직성이 낮고 정서성이 높은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이용해서 (또는 과장해서) 자신이 원래 받아야 할 몫보다 더 많이 챙기려 합니다. 시험 때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시간을 벌거나, 숙제 마감시간을 늦추려고 꾀병을 부리거나, 잡다한 변명거리를 끊임없이 들이대는 학생들이 아주 많지요 . 이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이렇듯 다소 대범해 보이지 않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편입니다. 배우자나 애인이 무엇이든지 다 해주고, 언제나 무언가를 가져다 바치도록 조종하는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슬퍼하고 토라져 있으니까요) 사람들도 이런 부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두려워해야 할 사람들은 아닙니다만, 울고 보채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식의 교활함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꽤 짜증스러운 타입일 수 있지요 .



H펙터의 심리학/이기범,마이클 애쉬튼 지음/2013/문예출판사

2015년 3월 27일 금요일

유대인의 비즈니스 10계

1.계약은 생명처럼, 우리 조상은 야훼와도 계약했다
2.서명은 신중하게, 운명이 왔다갔다 한다
3.막히면 뚫어라, 모든 길은 마음에서 나온다
4.온 세상이 장사거리, 흰 구름도 쥐어짜면 비가 된다
5.올바른 장사를 하려면 시장으로 가라
6.평생 신용을 지켜라, 신용이 없으면 문이 열리지 않는다.
7.한 우물을 파라, 결국 맑은 물이 용솟음칠 것이다.
8.항상 수집하는 정보에 거래 성패가 좌우된다.
9.체면과 형식에 사로잡힌 자는 알맹이가 없으니 멀리 하라
10. "유대인이 세계 경제를 좌우한다"는 이방인은 곧 칼을 들이댄다


/대한무역진흥공사 텔아비브 무역관 /

2015년 3월 26일 목요일

문명과 억압 ,리비도

◆ 문명과 억압의 상관관계
▲ 문명은 억압을 요청한다. 
프로이트 역시 문명이 본능을 억압한다고 말했고, 그로 인해 문명은 신경증에 걸려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유로운 본능충족의 관점에서 문명은 불만스럽다. 문제는 서구 문명, 근대 문명, 자본주의 문명 등 ‘어떤’ 문명이 아니고 “모든 문명은 강제와 본능억제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라이히와 마르쿠제는 이 ‘모든’을 ‘어떤’으로 바꿨고, 억압적이지 않은 문명의 가능성과 그 조건을 탐색한 것이다.
그럼, 프로이트는 왜 모든 문명은 반드시 억압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한 걸까? <문명은 억압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문장을 <문명은 억압을 요청한다>로 바꿔 쓰고 다시 두 문장으로 고쳐 써 보자. <문명은 억압을 필요로 한다>와 <문명은 억압을 욕망한다>로. 첫 번째 ‘필요’는 수동적 요청이고, 두 번째 ‘욕망’은 능동적 요청이다.

▲ 문명은 억압을 <필요>로 한다.
- 노동과 자연
문명의 억압은 <필요>의 차원에서 고찰된다. 필요(need)란 인간 유기체가 자연(1차 자연으로서의 자연환경과 2차 자연으로서의 현실환경) 속에서 생명활동을 지속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욕구need(자아보존 욕구, 식욕)를 의미한다. 즉, 필요란 <먹고 사는> 문제에 호응하는 식욕과 자기보존 본능으로 표상된다. 필요의 차원에서 <문명은 필연적으로 완전한 욕구충족을 제한해야 한다> 이 필요성, 혹은 필연성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필요의 차원에서 문명은 자연과의 대결 속에서 규정된다. 문명이란 인간 유기체가 자연 환경 속에서 생존을 영위하는 ‘동물적’(자연적: 야생적)이지 않은 방식이다. 프로이트는 그 ‘인간적’ 생존 방식을 ‘노동’과 ‘분배규칙’에서 찾았다.

- 프로이트에 따르면, 문명은 두 가지 기본적인 능력으로 규정되는데, 첫 번째는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 자연의 부를 빼내는 능력>이고, 두 번째는 <인간상호간의 관계를 조정하고 분배의 규칙을 정하는 능력>이다.
첫 번째 규정 속에서 인간문명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시작되었다. 자연과의 투쟁 속에서 인간은 ‘노동’과 노동수단, 즉 ‘도구’를 이용한 기술을 발달시켜, 자연의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자연을 착취하기까지 한다.
 두 번째 규정은 첫 번째 규정과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a)생산력의 양은 무한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분배의 문제가 발생하며(희소성) b)노동의 조직과정에서 어떤 인간은 다른 인간의 본능충족을 위한 대상이 되기 마련이고(계급성) c) 자연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인간은 집단생활을 해야 했고 공동생활 속에서 개인은 항상 자신의 욕구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집단성)
- 첫 번째 측면에서 문명은 노동기술의 발달에 따라 자연의 폭력과 희소성으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지지만 두 번째 측면에서 문명은 개개인의 욕구를 억제하는 법과 제도 때문에 자유로부터 멀어져 간다. 이 지점에서 문명의 ‘불만’ 내지 ‘모순’이 발생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이것을 첫 번째, 생산력의 발달에 조응하는 두 번째, 생산관계의 교체를 통해 해소시키지만, 프로이트에게 이 모순은 해소 불가능한 아포리아이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과연 실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모든 문명은 강제와 본능 억제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부분이 정치경제학적 관점으로부터 정신분석이 분리되어 나오는 지점인데, 이에 대한 논의는 잠시 미뤄두자.
- 프로이트에 따르면, 문명은 자연과의 대결에서 결코 완전한 승리를 구가할 수 없기 때문에 욕구불만 역시 완전히 해소될 수 없다. 지진, 폭풍, 홍수, 전염병,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자연의 위협 앞에서 문명은 근본적으로 무력하다. 완전히 길들일 수 없는 자연, “인간은 그것을 운명(아난케Ananke)이라고 부른다.”
“자연의 부를 빼내는 능력”으로서의 노동과 “분배의 규칙”을 요청하는 자연의 희소성(아난케)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프로이트는 물론이고 마르크스주의자들까지 인간(문명)의 본질로서의 노동과 자연의 본질(아난케)로서의 희소성의 대립관계만 파악할 뿐 상호규정성은 놓치고 있다. 인간의 본질로서의 ‘노동’이라는 개념과 자연의 본질로서의 ‘희소성’의 개념은 서구의 인식론적 지평에서 특정한 순간에 상호의존적으로 출현했다.
- 그 두 개념을 출현시킨 인식의 장은 19세기 경제학의 에피스테메이다. 고전주의 시대에 ‘부’를 표상하는 방식과 19세기에 ‘부(가치)’를 이해하는 방식은 전혀 달랐다. 고전주의 시대 중상주의자들에게 ‘희소성’이란 개념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노동과의 관계에서 규정된 게 아니라 “자기가 소유하지 않은 물품의 표상”으로 존재했다. 고전주의 시대에 ‘부’는 교환의 테이블 위에서 ‘필요’가 표상되는 방식 속에서 정의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 표상의 질서가 붕괴된 자리에 인간의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가치’라는 개념이 출현했다.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면서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로 규정되었고, 자연은 ‘불충분함’을 내재하게 되었다. 희소성의 “근저를 이루는 것은 필요도 아니고, 필요의 표상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근본적인 불충분함일 뿐이다. 사실상 노동 - 경제활동 - 이 세계의 역사 속에서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은 인간이 너무 많아져서 토지에서 자연적으로 생산되는 결실의 양만으로는 더 이상 충당되지 않을 때였다.… 따라서 경제를 가능케 하고 필요하게 하는 것은 희소성의 항구적이고 기본적인 사항이다.” 즉, 19세기에 들어와서 가치(부)는 자연에 내재하며 화폐(금)에 의해 표상(교환)되는 게 아니라, 자연의 희소성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 유기체의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 인간(문명)의 노동이 자연의 희소성(need)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프로이트)과 생산력의 발달에 의해 극복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마르쿠제)의 차이는 동일한 에피스테메 속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말싸움에 불과하다. 인간의 노동과 자연의 희소성은 애초부터 같은 (19세기 근대 에피스테메의) 배에서 태어난 쌍생아이다. 자연의 결핍(희소성)은 인간의 노동이 설정되는 순간부터 선험적으로 해소불가능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스탈린식 ‘생산력 주의’의 내적 모순이다.

◆ 득이 되는 문명, 해가 되는 문명
▲ 리비도의 해방
- 마르쿠제 역시 이 <노동가치론>, <생산력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본능충동을 대표하는 에로스와 문명 사이의 불화는 노동의 근본적 필요성이라는 ‘현실원칙’에서 비롯된다. 그에 따르면, “자유로운 리비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노동의 관계와는 적대적이며, 활동력은 노동의 관계를 조직하기 위하여 자유로운 리비도의 관계로부터 물러나야 한다. 만족의 결여만이 노동의 사회적 조직을 유지한다.” “노동의 근본적 필요성”, 즉 문명의 수립과 발달을 위해서는 프로이트가 제기한 ‘현실원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만, 이 현실원칙은 노동의 조직화 방식에 따라 각기 다른 ‘수행원칙’을 추가로 요청하는데, 생산력의 발달은 소외된 노동을 강요하는 억압적 제도를 철폐하도록 추동하고(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 노동시간을 줄여 쾌락을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을 증대시킨다고 한다. 그 마지막 도달점은 완전 자동-기계화를 통한 노동해방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작업시간과 에너지가 최소로 감소된다면 억제의 근거가 사라지고 리비도는 해방된다”
- 노동생산성과 기술의 발달이 그 자체로 쾌락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님은 프로이트 시대 문명비판론자들도 알고 있었다. “여기서 비관적인 목소리가 들린다....거리를 줄이는 철도가 없다면 자식은 애당초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테고, 자식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전화를 놓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대양을 건너는 여행이 도입되지 않았다면 친구는 애당초 항해를 떠나지도 않았을 테고, 친구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전보를 받고 친구에 대한 걱정을 달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청결과 위생이 문명의 특징이라고 했는데, 구강청정제가 없었다면 입냄새는 나지 않았을 것이고, 겨드랑이털 제모제가 없었다면 겨드랑이 털은 혐오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의료기술은 어떤가? “사회들은 그들이 치료할 수 있는 병들만을 허용하며 병리학적으로 정통해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과학과 기술로 새로운 치료법을 수없이 개발해 내는 우리의 문명이 그다지도 많은 질병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아닐까?
- 이것은 프로이트의 말처럼 ‘행복의 주관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욕구(결여)의 사회적 객관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노동(문명)은 자연의 결핍(희소성)을 정복하거나 못하지 않는다. 노동과 노동을 조직하는 ‘수행원칙’, 혹은 ‘사회적 관계 형식’이 결핍(욕구)을 생산하는 것이다.
▲ 문명과 야만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자들까지 포함하여 문명론자들은 한결같이 문명을 야만과 대비시켜 파악했고, 야만인, 혹은 원시인의 경제생활은 자연의 위협과 희소성에 압도되어 먹고사는 문제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야 하는 욕구(결핍)의 경제, 생존의 경제로 보았다. 문명은 노동과 기술을 통해 이로부터 탈출한 상태라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하지만 민족지학자들이 한결같이 보고하는 바에 따르면 소위 원시인들의 생활은 결코 ‘빈곤’하지 않았다. “남아메리카에서는 한결같이 인디인들이 게으르다고 말한다...야노마미족의 경우 하루에 1인당 세 시간의 평균적인 활동을 하면 사회의 모든 필요가 충족된다. 대부분의 원시사회가 그렇다. 하루에 21시간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지내므로 이들의 문명을 오락의 문명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들은 지루해하지 않으며 낮잠, 익살, 논쟁, 마약, 식사, 목욕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
- 자연의 희소성, 삶의 빈곤함은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노동가치론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산물이다. 자본주의는 그 시초부터 원주민들의 자급생활의 수단인 빵나무를 베어내고 그들의 공유지에 울타리를 쳐서 빈곤(결여) 상태로 내 몰았고 그 결여를 극복하기 위해 공장에서 노동력을 판매하는 프롤레타리아가 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가 자랑하는 생산성의 증진은 더 많은 기계의 도입을 가져왔다. 그 기계의 리듬에 맞추면서 ‘생산성이 증대하면 나머지 시간은 놀고먹던’ 사람들은 ‘더 많은 양을 생산하는’ 노동기계로 전락했고, 잉여 노동력은 빈곤의 공포지대, 즉 실업자의 삶으로 밀어 넣었다. 이 산업예비군의 빈곤은 거꾸로 자본가들이 노동력(임금) 시장에서 싼 값으로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했다. 빈곤(결핍)은 ‘잉여’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문명의 산물이다.


출처

정신분석학입문:프로이트 파농 푸코 지젝 탐구 강사 박정수 강의록 제 7강 문명의 영향력과 정신분석1

흑인의 불어, 남근/결여의 기표

프란츠 파농은 1927년 프랑스령 앤틸리스(서인도) 제도, 마르티니크 섬의 포르 드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과 프랑스 출신의 백인, 그리고 그들 사이의 혼혈인(뮬라토)으로 구성된 이 프랑스 식민지에서 태어난 인간은 어떤 언어 속으로 태어날까? 대부분의 하층민들은 일상어인 크레올을 사용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중산층은 표준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이러한 이언어적 현실은 프랑스의 식민지 동화정책의 산물이다. 프랑스는 마르티니크 흑인들을 피지배자가 아니라 프랑스 국민으로 인정했고, 프랑스 국민이라면 프랑스어를 훌륭하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유혹했다. 그 유혹에 이끌린 식민지인들은 프랑스 국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일상어인 크레올을 억압해 왔다. 그러나 식민지 동화정책은 문자그대로 실현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식민지에 대한 착취와 차별이 없다면 식민지는 존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민지 동화 정책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라! 라는 공식적인 명령과 식민지 언어(크레올)를 사용하라! 라는 이면의 명령을 동시에 발한다.
- 이런 식민주의의 이중구속 속에서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주체-위치를 결정하는 물신화된 상징이 된다. “불어 구사능력에 따라 백인화의 정도를 평가받는 것이다.”프랑스어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바꾸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소유함으로써 “밀림의 신분”, “원시인”, “흑인”의 존재를 폐기하고 문명화된 백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을 결여된 존재로 인정하고, 불어를 소유함으로써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이 식민화된 소망은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여성이 갖는 남근 선망과 상동적이다. 남근이 결여된 자신의 결여를 인정하고 남근을 가진 남자나 남근의 대리물인 아이를 소유함으로써 결여를 메우고자 하는 것이 여성의 외디푸스 콤플렉스 해소방법이라는 점에서. 식민주의 속에서 내지의 언어(불어)는 남근의 상징이다. 식민주의 속에서 식민지가 여성으로 성별-표상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그러나 식민지인들의 사회-상징적 ‘여성화’는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의 ‘여성화’보다 더 어렵다. 자신의 결여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불어를 완전히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타자가 그의 존재 변이를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소망은 억압된 타자성을 살고 있는 식민지 원주민에 의해, 그리고 자신의 백인화를 인정해 줄 프랑스인들에 의해 좌절된다. 먼저, 식민주의적 욕망의 헛됨을 알고 있는 원주민 아버지의 폭력에 의해 그들의 백인화는 좌절된다. 다음의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사례: “프랑스에서 몇 개월을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한 꼬마가 있었다. 농기구를 보면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저 농기구 이름이 뭐였지요? 그의 아버지가 그 농기구를 그 꼬마의 발등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의 정신이 번쩍 들더니 이내 기억상실증이 사라졌다.”
- 프로이트가 『일상생활의 정신병리』에서 보고하고 있는 ‘망각’의 사례들과 비교해 봄 직하다. 이 신출내기 흑인 유학생의 ‘망각’은 크레올의 ‘억압’에 기인한 것이다. 그것을 간파한 크레올 사용자인 아버지는 “놀라운 방법”으로 그의 단어 망각을 치료해준다. 사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단순하지만 심오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리적으로, 폭력적으로 대면시킨 것은 단지 ‘농기구’의 사물성이 아니다. 그것은 ‘흑인’의 사물성이다. 다행히 풋내기 아들의 억압이 심각하지 않아서 그렇지, 심했다면 자신이 억압한 흑인성과의 이 폭력적 대면은 아들을 정신병으로 몰아갔을 것이다.
다음으로, 불어의 소유를 통한 백인화의 소망은 식민모국의 타자에 의해 좌절된다. 프랑스로 유학을 간 마르티니크 지식인들은 아무리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해도 결코 자신을 백인으로 봐 주지 않는 프랑스인들을 만나게 된다. 까만 피부라는 물질성 앞에 불어의 상징성은 무력하기 그지없다. 일단, 프랑스인들은 흑인을 만나면 마치 어린애한테 말하듯 반말 투의 피진을 사용한다. 기차를 타고 옆자리 승객에게 정확하고 분명하게 "실례합니다. 식당 칸이 어딘지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라고 물어봐도 그들은 여지없이 피진을 사용해서 대답한다. 심지어 앙드레 브레통 같은 진보적인 예술가조차 세자르에 대해 “여기 오늘날 그 어떤 백인들도 감히 구사할 수 없는 정도의 수준으로 불어를 부릴 줄 아는 한 흑인이 있다”라는 식으로밖에 평가하지 못한다.

◆ 불어의 남근적 상징과 흑인의 선망
▲ 남근 기표 = 결여의 기표
불어의 남근적 위력은 식민지 마르티니크 사람들이나 그보다 훨씬 덜 동화된 세자르 흑인들에게나 통할 뿐 정작 프랑스 본국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흑인의 불어는 흑인의 열등감을 더욱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기표가 될 뿐이다. ‘쯧쯧. 저 흑인은 자신의 흑인성을 벗기 위해 얼마나 애썼으면 저렇게도 불어를 잘 할꼬..’ 식민지에서의 남근 기표가 식민모국에서는 결여의 기표로 전도되는 것이다. 왜 이런 전도가 일어나는 걸까? 원래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남근이란 실재의 성기가 아니라 ‘이미 없거나’(여자아이) ‘없어질 수도 있는’(남자 아이) 것으로서만, 즉 결여(부재)의 형식 속에서만 작동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물론,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남근의 기능은 성적 차이를 도입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식민지인에게 불어는 마치 그것을 가지면 백인이 될 수 있을 것처럼 유혹적이지만, 그것은 식민지와 식민지본국의 차이를 도입하기 위한 가상의 미끼일 뿐이다. 그것을 선망하면 할수록, 그것을 소유하면 할수록, 식민지 흑인의 결여는 더욱 선명해진다.
▲ 흑인의 남근-선망과 남근-되기
- 식민화와 외디푸스화의 결합은 성 대상을 선택하는 데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외디푸스화된 식민지 여성은 백인 남성의 남근을 소유함으로써, 백인과 가까운 아이를 소유함으로써 흑인성으로부터 탈출하려 한다. 뮬라토 여성이라면 이런 소망은 더욱 강렬해진다. 그래서 뮬라토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한 흑인 남성은 “‘백인 여성’의 명예를 먹칠했다는” 죄로 법정에 제소를 당해야 한다. 뮬라토 여성에게는 백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남근 선망)과 함께 흑인으로 되돌아 갈 지로 모른다는 공포(거세 공포)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들도 알게 되리라. 백인 남성들은 결코 흑인 여성들과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백인 남자의 아내로서, 백인 아기의 엄마로서 백인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하는 것도 전혀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다. 어차피 백인 사회의 주인은 백인 남성이므로, 식민지 흑인 여성의 외디푸스적 소망(결여를 받아들이고 남근과 아이를 통해 결여를 치유하고자 하는 소망)은 백인 남성의 성적 판타지와 관용에 의해 언제라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게 아닐까?
- 식민지 흑인 남성 역시 “나를 사랑해주는 백인 여성”을 통해 백인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사랑’을 통한 흑인 여성의 백인화 소망과 흑인 남성의 백인화에는 성적 차이가 있다. 흑인 여성은 백인 남성의 사랑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남근을, 혹은 백인 아기를 원하는 데 반해, 흑인 남성은 백인 여성의 사랑을 원하거나 백인 여성의 몸을 정복하고자 한다. “나의 지칠 줄 모르는 손이 그 순백의 젖가슴을 애무하는 순간 백인의 문명과 존엄이 내 손아귀 속에서 내 것으로 화하는 것이다” 그에게 백인 여성은 그 자체로 남근적인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은 “백인 남성처럼 사랑 받는” 것이다. “나를 사랑해주는 백인 여성”, 내 밑에 깔려 있는 백인 여성을 통해 그는 백인 남성과 동일화되기를, 백인 남성의 성적 위치를 차지하고 싶은 것이다. 이 식민주의적 욕망은 동시에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남자아이에게 배당된 욕망이다. 아버지와의 동일시. 흑인 남성의 성적 판타지에서 그가 동일화한 백인 남자는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아버지의 자리에 있다.
- 백인 여성의 몸을 정복함으로써 백인 남성의 자리를 차지하는 성적 판타지는 전형적인 식민지 민족주의의 판타지이다. “약 30여년 전에 석탄처럼 새까만 한 흑인 남자가 파리에서 미친 금발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오르가즘에 도달할 찰라, 그는 갑자기 ‘슐레허 만세’라고 소리쳤다.”) 94년 르완다 사태를 다룬 <호텔 르완다>에서 후투 민병대가 미친 들개처럼 투치족 여성들을 창녀 취급할 때, 거기서도 벨기에 식민모국에 의해 선택받은 투치 여성들에 대한 후투족의 민족주의적 리비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녀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학생출신 노동지도자(독고영재 분)가 시위 한 가운데서 여공(정선경 분)을 후배위로 공격하면서 ‘파쇼 타도!’를 외치는 장면도 유사하다. 사회적 억압에 대한 분노가 여성을 향한 리비도적 공격으로 표출되는 이 장면들에서 피억압 남성들은 억압자에 대한 ‘증오’의 이면에 억압자와 동일화되고 싶은 욕망을 감추지 못한다. 백인남성의 노예였던 흑인 남성들은 백인 여성을 통해 “주인이 되고 싶어한다.”
 -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흑인 지식인은 “나를 사랑해 주는 백인” 여성이 다가와도, 자기 역시 그녀를 사랑해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녀에 대한 사랑에서 “백인여성의 순백한 살결”에 대한 ‘흑인’의 성욕을 발견하고, 그 속에 섞여있는 “수세기에 걸쳐 내 종족에게 가해를 입혔던 백인”에 대한 ‘흑인’의 증오를 읽어내기 때문이다. 그의 ‘포기’는 이중적이다. 백인여성을 향한 사랑의 포기에는 백인남성을 향한 리비도적 증오의 포기가 포개진다. 한마디로, 그의 ‘포기 신경증’은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 ‘흑인성’의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그의 포기신경증은 외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된다. “한때 아주 오래 전에 내가 한 대상과의 관계를 시도했으나 버림받고 말았다는 것 때문이다. 그 대상인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버림받음의 고통, 그것을 내가 당한 만큼 타인에게 되갚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내 복수욕을 재확인하겠다는 것이다.”) 이 부정적-공격(negative aggress) 성향이 백인남성들도 겪는, 따라서 보편적인 유아기 콤플렉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백인남성-백인여성-흑인남성 사이의 인종주의적 삼각관계가 아버지-어머니-아이 사이의 외디푸스적 삼각관계와 동일한 구조, 즉 <권력의 담지자-욕망의 대상-결여된 주체>의 구조를 갖는다는 점에서는 맞다. 하지만 이 구조적 상동성으로부터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보편적으로) 먼저 있고 그것이 성인 사회의 (특수한) 인종주의 콤플렉스로 투사, 반복된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외디푸스 콤플렉스야말로 결여를 중심으로 한 권력과 욕망의 삼각함수를 유아기 가족에 투사한 것이다. 아버지-어머니-아이가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이미 권력과 욕망의 함수관계로 형성된 사회적 신체 위에 등록된 흑인 가족이 있는 것이다.




출처
정신분석학입문:프로이트 파농 푸코 지젝 탐구 강사 박정수 강의록
9강 탈식민주의의 언어적 상징

2015년 3월 21일 토요일

사쿠라바 유이치로

신고하고, 식을 올리는 건 나중에 해도 상관없어
그런 것보다 가족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먼저라니까
나도 빨리 식 올리고 싶고 신고도 하고 싶어
하지만 지금 그러면 어떻게 되?
따뜻한 가정을 손에 넣기는 커녕
아버님과 카에데 누님 , 아즈사 누님 사츠키 누님 료군 츠토무군 모두 버리게 되는 일이 될지 몰라 그런 일 죽어도 시키고 싶지 않아.
나도 처음부터 인정받을 생각하지 않았어
나는 23년간 가족을 가지고 싶다고 꿈꾸어 왔어
소중한 꿈이 그렇게 간단히 손에 들어오면 참을 수가 없지
쉽게 이루어지면 오히려 실망하지
참는다고 꿈이 이루어지진 않지
꿈은 갓츠로 얻는 것이야 .
말해두지만 내 갓츠는 보통[이 아니니까

데릴사위02 34:25초~ 36:25


2015년 3월 19일 목요일

무용한 문학의 유용성론-김현 평론가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 준다. 이것이 바로 쓸모없는 문학이 쓸모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