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9일 월요일

비슈누

비슈누는 권능을 지닌 다른 신들처럼, 네 개 혹은 그 이상의 팔을 가진다. 오른쪽 한 손에는 우주를 돌리는 바퀴를 지니고 왼손에는 물을 상징하는 소라를 지니고 있다.
오른쪽 또 한 손에 지닌 곤봉은 지식의 힘과 권위를 상징한다.
반인반조의 형상을 한 가루다(독수리)를 타고 다닌다.


나는 비슈누의 위대한 행위를 노래하고자 하노라. 그는 큰 보폭으로 세 걸음을 걸어서, 땅을 구분해내었고, 가장 높은 천상의 거주지를 세웠도다.
이로써 비슈누의 위대한 행위가 찬양을 받노니, 그는 산속에 머물며 사나운 들짐승처럼 이리저리 다니노라. 그의 큰 세 걸음으로 이루어진 영역 속에서 모든 피조물이 지내는도다
산속에 거주하면서, 홀로 큰 세 걸음으로 길고도 아득한 거주지를 만들어낸 ,큰 보폭의 황소, 비슈누 그대에게 이 영감의 노래가 들려지길 바라나이다.
그의 세 발자국 속에 담긴 무한한 꿀로 가득한 제의의 음료로 기뻐하라. 그는 홀로 땅과 하늘과 모든 피조물을 지탱하고 있도다.
사람들이 신들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그곳, 그가 즐기는 안식처에 내가 도달할 수 있을까?
비슈누가 걸어간 가장 높은 그곳, 비슈누 바로 곁에 꿀샘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로다.
우리는 그대 비슈누가 머무는 곳에 가고자 하나이다. 그곳은 피곤을 모르는 곳이며 많은 뿔을 가진 가축들이 있는 곳이로다. 큰 보폭의 황소의 발자국이 있는 지극히 높은 그곳은 밝은 빛이 빛나는 곳이로다.

리그베다 I.154.1~6

베다/이명권/2013/한길사


HYMN CLIV. Viṣṇu

1. I WILL declare the mighty deeds of Viṣṇu, of him who measured out the earthly regions,
Who propped the highest place of congregation, thrice setting down his footstep, widely striding.
2 For this his mighty deed is Viṣṇu lauded, like some wild beast, dread, prowling, mountain-roaming;
He within whose three wide-extended paces all living creatures have their habitation.
3 Let the hymn lift itself as strength to Viṣṇu, the Bull far-striding, dwelling on the mountains,
Him who alone with triple step hath measured this common dwelling-place, long, far extended.
4 Him whose three places that are filled with sweetness, imperishable, joy as it may list them,
Who verily alone upholds the threefold, the earth, the heaven, and all living creatures.
5 May I attain to that his well-loved mansion where men devoted to the Gods are happy.
For there springs, close akin to the Wide-Strider, the well of meath in Viṣṇu's highest footstep.
6 Fain would we go unto your dwelling-places where there are many-horned and nimble oxen,
For mightily, there, shineth down upon us the widely-striding Bull's sublimest mansion.

http://www.sacred-texts.com/hin/rigveda/rv01154.htm

http://www.harekrsna.de/garuda-e.htm

2016년 2월 28일 일요일

카스트 제도의 기원 푸루샤


Purusha (Sanskrit puruṣa, पुरुष)



우리는 베다를 통해 인도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몸을 희생해 우주를 만든 거인 푸루샤의 머리는 하늘로, 눈은 태양으로 , 다리는 땅으로 변하고, 숨결은 바람이 되었다. 푸루샤의 입은 브라만, 팔은 크샤트리아, 다리는 바이샤, 발은 수드라가 되어 네 종류의 사람이 만들어졌다. 이 신화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의 기원이다. 



"푸루샤는 천 개의 머리, 천 개의 눈, 천 개의 발을 가졌다. 사방 온 세계에 편만해 있는 그는 열 개의 손가락을 그 너머로 뻗치고 있다. 

푸루샤는 정녕 이 모든 세계 그 자체이며, 세계로서 존재해왔고 또 존재하게 될 것이다.그는 
(제사)음식을 통하여 탄생시킨 불멸(신들)의 세계를 통치한다.
이것이 푸루샤의 위대성이며, 동시에 푸루샤의 능력은 이것도 넘어선다. 모든 피조물은 푸루샤의 4분의 1에 불과하며 나머지 4분의 3은 하늘에 있는 불멸의 것들이다.
푸루샤의 4분의 3은 위로 올라가고 4분의 1은 여전히 지상에 남는다. 이 지상에서 다시 온 사방으로 뻗쳐 생물(먹는 것)과 무생물(먹지 않는 것)에게 침투한다.
푸루샤로부터 비라즈(viraj)가 탄생되었고, 비라즈로부터 다시 푸루샤가 나왔다. 푸루샤가 탄생될 때, 그는 지구 너머 그 이면까지 뻗쳤다."(리그베다 X 90.1~5)


천수천안 관자재 보살 

우주적 거인 푸루샤의 탄생으로 이제는 푸루샤가 신들을 지배하는 차원으로 격상된다. 불멸의 신들 또한 제사음식을 통해 탄생하는 것으로 묘사됨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다의 세계과 사상은 '음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 음식은 생명을 낳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심지어 음식은 신들까지 탄생시킨다. 음식의 봉헌은 희생제사의 핵심이다.

하필이면 왜 음식일가? 자세히 생각해보면 우주는 온통 먹고 먹힘의 사슬구조이다. 이 구조 속에서 희생제의도 탄생과 재생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런 점에서 앞서 언급한 불의 신 아그니(Agni)는 '먹는 자'요, 술의 신 소마(Soma)는 '먹히는 자'다 . 태양은 삼키고 술은 마셔진다. 마셔지는 음식으로서 소마는 만물을 살리는 생식의 원동력이다.

베다/이명권 지음/2013/한길사

2016년 2월 27일 토요일

인간의 불확실성과 취약성은 모든 정치권력의 기초다.

인간의 불확실성과 취약성은 모든 정치권력의 기초다. 불쾌하지만 인간 조건에 항상 붙어 다니는 이러한 쌍둥이에 대항하고, 이것들이 만들어 내는 공포와 불안에 대항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한 바이다. 그리고 현대 국가가 시민의 복종과 선거에서의 지지뿐 아니라 그 존재 이유를 도출한 것도 대부분 이 약속으로부터이다.
'정상적인' 현대 사회에서 존재의 취약성과 불안, 그리고 심각하고 구제할 길 없는 불확실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살고 행동할 필연성은 악명 높게 변덕스럽고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시장의 힘에 삶의 추구를 노출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시장 자유의 법적 조건을 창출하고 보호하는 과제를 제외하면 정치권력은 불확실성의 생산 및 그 결과 벌어지는 실존적 불안의 확산에 기여할 필요가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

2016년 2월 7일 일요일

민족주의

민족주의 세가지 패러독스
1. 역사가들의 객관적인 눈으로 볼 때 민족들은 근대성을 가진 반면, 민족주의자들의 주관적인 눈으로 볼 때 민족들은 고대성을 지녔다.
2. 근대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그' 혹은 '그녀'로서 성별을 가진 것처럼 국적을 가질 수 있고, '가져야'하고 '가질'것이라는 사회문화적 개념으로서의 국적의 형식적 보편성이 있는 반면에, 정의상'그리스' 국적이 독특한 것처럼 민족주의의 구체적 표현에 있어서 바꿀 수 없는 특수성이 있다.
3. 민족주의가 '정치적'으로는 위력이 있는 반면 철학적으로는 그 내용이 빈곤하고 일관성마저 결여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대다수의 다른 주의들(isms)과는 달리 민족주의는 자신의 대사상가를 배출해내지 못했다. 민족주의 사상가 중에는 홉스, 토크빌, 맑스, 베버와 같은 사상가들이 없다. 이러한 사상적 '공허함'이 세계주의적이고 다양한 언어에 능통한 지성인들 사이에 쉽게 일종의 겸양을 일으킨다.



(...)우리가 민족주의를 자유주의나 전체주의 보다는 친족이나 종교와 연관되는 것으로 취급해졌으면 문제는 더 쉬워졌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인류학적 정신에서 다음과 같은 민족의 정의를 제안한다. 즉 민족은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이다.
민족은 가장 작은 민족의 성원들도 대부분의 자기 동료들을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며 심지어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지만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서로의 친교의 이미지가 살아있기 때문에 상상된 것이다. 르낭이 "민족의 핵심은 전 소속원들이 많은 것을 공유한다는 사실이며, 동시에 전 소속원들이 많은 것을 망각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민족은 제한된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10억의 인구를 가진 가장 큰 민족도 비록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한정된 경계를 가지고 있어 그너머에는 다른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민족도 그 자신을 인류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어떤 구세주적 민족주의자들도 기독교도들이 어느 시대에 기독교도만 모인 행성이 도래할 것이라고 꿈꾸는 것과 같이 모든 인류의 성원이 그들의 민족에 동참하는 날이 올 것을 꿈꾸지는 않는다.
 민족은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계몽사상과 혁명이 신이 정한 계층적 왕국의 합법성을 무너뜨리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어떤 보편적인 종교의 가장 신앙심 깊은 추종자라도 보편적인 종교들이 여러 존재한다는 사실과, 각 신앙의 존재론적 주장과 영토적 한계 사이에 이질동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런 인간의 역사 단계애서 민족들은 자유롭기를 꿈꾸며 만일 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면, 직접 받기를 꿈꿈다. 이 자유의 표식과 상징은 주권 국가이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각 민족에 보편화되어 있을지 모르는 실질적인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의식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지난 2세기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제한된 상상체들을 위해 남을 죽이기보다 스스로 기꺼이 죽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형제애이다.
 이러한 죽음은 우리를 민족주의가 제기하는 핵심적인 문제에 갑자기 직면하게 한다. 무엇이 (겨우 2세기 정도밖에 안되는) 근대 역사의 축소된 상상체들로 하여금 그렇게 대량의 희생을 낳게 하는가? 나는 이 대답의 시작이 민족주의의 문화적 근원에 놓여있다고 믿는다.


오늘날에는 왕국이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 체제인 세계 속으로 자기 자신을 이입해 보는 일이 어렵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진정한 군주제는 정치생활에 대한 모든 근대적 개념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왕권은 모든 것을 중앙 중심적으로 조직한다.왕권의 정통성은 주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서 나온다. 주민은 시민(citizens)이 아니고 백성(subjects)일 뿐이다.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베네딕트 앤더슨 저/ 윤형숙 역/ 나남/2002년 6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