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14일 월요일

광장에서 시장으로

민주주의는 아고라 ,곧 광장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형식이다. 아고라는 폴리스의 다른 두 영역인 에클레시아와 오이코스를 연결하고 동시에 분리하는 매개 공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에서 오이코스는 가족공간을 의미하며, 그 안에서 사적 이익이 형성되고 추구되는 장소를 말한다. 반면 에클레시아는 '공적' 공간을 의미하며, 선출이나 지명, 또는 추첨에 의해 정해진 정무관으로 구성된 민회를 뜻한다. 그 기능은 폴리스의 모든 시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동의 관심사인 전쟁과 평화, 국토 방어, 그리고 도시 국가에 속한 시민의 공동생활을 지배하는 규칙 같은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에클레시아의 어원은 '부르다' ' 소집하다' '모으다'라는 의미의 동사 kalein으로 이 개념은 처음부터 아고라의 존재를 상정했다. 아고라는 모여서 이야기하는 곳 ,시민과 민회가 만나는 곳으로, 민주주의의 장소였다.

(...)그러므로 한 정치 체제의 민주주의적 성숙도는 이러한 번역의 성공과 실패, 매끄러움과 거칢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즉 그 주된 목적을 달성한 정도에 의해 측정되어야지, 종종 민주주의(모든 민주주의, 민주주의 자체)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오인되곤 하는 이러저러한 절차의 완고한 준수 여부에 의해 측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단 대중 투표가 통치자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유일하게 수용 가능한 지표가 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간접 참여의 효율은 종종 논쟁거리가 되곤 했다. 공연한 반대나 공개 토론을 용인하지 않는 명백한 권위주의적, 전체적, 전체주의적, 폭압적 체제가 의사 표현의 자유를 신중하게 존중하고 보호하는 체제보다 더 높은 투표율(따라서 형식적 기준에 따르면, 통치자의 정책에 대한 더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 후자의 체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투표율을 쉽사리 자랑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가 출연하는 초기단계, 이른바 자본의 ' 원시 축적'단계는 심각한 분노를 표출하는 미증유의 사회 격변, 생계 수단의 강탈, 그리고 생활 조건의 양극화 같은 특징을 예외없이 드러낸다는 점을 기억하자. 이러한 특징들은 그 희생자들에게 충격을 주면서 폭발의 잠재력을 내포한 사회적 긴장을 창출할 수밖에 없으며, 신흥 사업가와 상인은 강력하고 무자비하고 위압적인 독재 체제를 등에 업고 이러한 긴장을 억눌러야 한다. 그리고 전후 일본과 독일의 '경제 기적'에서 상당 부분은, 토착 정치 기관으로부터 국가 권력의 강제/ 억압 기능은 넘겨받은 반면 피점령국의 민주주의 제도에 의한 통제는 효과적으로 회피한 외국 점령군의 존재 덕분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을 첨언한다.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민주적 권리의 형식적 보편성과 권리 보유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의 비보편성 사이의 모순은 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악명 높은 약점 가운데 하나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법률상의 시민'의 법적 조건과 '사실상의 시민'의 실제 역량을 나누는 간격, 개인이 자기 기술과 자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이러한 기술과 자원이 없다)을 동원해서 매울 것으로 기대되는 간격이다.
(...)선택의 자유는 결국 계산할 수 없는 무수한 실패의 위험을 수반하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능력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빠져 이러한 위험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더 많은 이들은, 실패의 두려움이 공동체의 이름으로 발급된 보험 증권(개인적 실패나 불의의 재난에 처했을 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증권)에 의해 완화되지 않는 한, 선택의 자유라는 자유주의의 이상을 형체 없는 유령이나 헛된 꿈으로 여길 것이다.

만약 민주적 권리와, 그 권리에 수반하는 자유가 이론상으로는 부여되지만 실제로는 획득될 수 없다면, 절망의 고통보다는 불운의 수모가 확실히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나날이 시험받는 , 삶의 도전에 대처하는 능력은 결국 개개인의 자신감과 자부심을 투사하거나 용해하는 작업장이다. 사회 국가가 아닌 정치 국가, 사회 국가가 되기를 거부하는 정치 국가에서는 개인적 나태와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다. 만인을 위한 사회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마 갈수록 많은 사람이 자신의 정치권이 쓸모없거나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정치권이 사회권을 제자리에 놓이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사회권은 정치권을 '현실적인' 존재로 자리 잡고 계속 작동하게 하는 데 불가결한 것이다. 정치권과 사회권은 자기 존속을 위해 상대방을 필요로 하며, 이러한 존속은 공동의 성취일 수 밖에 없다.
 *사회국가라는 명칭은 강조의 초점을 물질적 이득의 분배에서, 물질적 이득의 제공을 통해 공동체 건설을 추진한다는 동기로 이동시킨다.

(...)

약 60년 전 T.H 마셜은 당시 유행하던 사조를 재구성해서 시간을 초월한 인류 진보의 보편 법칙을 자신 있게 내놓았다. 그것은 재산권에서 정치권으로, 그다음 사회권으로 나아가는 진보였다. 그가 볼 때 정치적 자유는 경제적 자유의 불가피한 , 심지어 다소 지연된 산물이었다. 한편 정치적 자유는 필연적으로 사회권을 낳았고, 그에 따라 두가지 자유를 모든 사람이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마셜은 정치권이 잇달아 확대되는 데 발맞추어, 아고라는 수용 인원을 더 늘리고 이전에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부류의 사람들에게 차츰차츰 발언권이 주어지고 불평등이 점점 줄어들고 차별이 갈수록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약 25년 후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마셜의 예측을 대놓고 반박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수정해야 할 또 다른 규칙성을 포착했다. 즉 사회권의 보편화가 결실을 거두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많은 정치권 보유자들이 개인적 이익을 위한 안건을 지지하는 데 투표권을 행사하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 소득이나 생활 수준, 삶의 전망에 관한 불평등이 줄어들거나 없어지기는커녕 더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갤브레이스는 이러한 추세가 새롭게 등장한 '만족하는 다수파'
가 드러내는 이전과 확실히 다른 풍조와 인생철학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위험이 큰 반면 기회도 풍부한 세계에서 확고히 주류의 자리를 차지한 신흥 다수파는 '복지 국가'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복지 국가는 안전망이기보다는 감옥이었고, 기회이기보다는 제약이었다. 또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전 세계를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는 그들의 입장에서 복지 국가는 결코 필요할 리도 없고 이득을 볼 성싶지도 않은 낭비에 불과했다. 그들이 보기에 한자리에 붙박인 일국의 빈민은 더는 '노동 예비군'(현역으로 다시 동원될 때를 대비해 예비군의 전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고, 빈민층을 돕는 데 돈을 쓰는 것은 낭비에 불과했다. 마셜이 '인권의 역사적 논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할 지점으로 생각한 사회 국가에 대한 '좌우를 넘어선' 광범위한 지지는 점점 더 빠르게 줄어들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복지 국가에 대한 재정 지원이 부족해지고 붕괴되며, 심지어 적극적으로 폐지되는 것은 자본주의 이윤의 원천이 공장 노동자의 착취에서 소비자의 착취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또한 소비 시장의 유혹에 대응하는 데 필요한 자원이 없는 빈민에게는, 소비 자본의 관점에서 본'유용함'을 증명하는 현금과 신용 계좌('복지국가'가 제공하는 종류의 서비스가 아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복지국가는 오늘날의 '사류화(私類化)' 조류( 소비 시장의 본질적으로 반공동체적이고 개인화된 생활 유형, 사람들을 타인과의 경쟁에 몰아넣는 생활 유형)를 꼭 집어 방지하기 위해 고안되고 장려된 듯한 기획이었다. 사유화 조류는 사람들 사이 유대의 그물을 약화시키고 붕괴시킴으로써 인적 연대의 사회적 기초를 잠식하는 것이었다. '사유화'는 사회적으로 생산된 문제들에 맞서 싸워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벅찬 과제를,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목적에 맞는 자원이 부족한 개인들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반면 사회 국가는 무자비하고 부도덕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에서 희생자를 내지 않기 위해 구성원들을 단결시키는 성향을 띤다.

(...)

그렇지만 지금 우리(세계 시장, 국제 통화 기금, 세계은행의 일치된 압력을 받는' 개발 도상국'의 '우리'뿐 아니라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선진국'의 '우리')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현실적인 것이든 상상된 것이든 '총체성'과 사회와 공동체는 점차 '공허하게' 되어 간다. 개인적 자율성의 범위는 확대되고 있지만, 동시에 과거에는 국가의 책임으로 여겨졌던 기능이 지금은 개인적 고려 사항으로 ('자회사'로 분할되듯이) 이전되었다. 국가는 단체 보험 증서에 대한 보증에 열의가 없으며 갈수록 많은 유보 조항을 달게 되고 , 안전한 복지의 추구는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

(...)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길이와 밀도가 급속히 늘어나는 '정보 고속 도로'의 네트워크 덕분에, 모든 개인은 자기 몫을 모든 다른 개인, 특히 공적 우상(텔레비전과 타블로이드 신문, 그리고 대중 잡지 전면에 등장하여 끊임없이 각광을 받는 유명 인사들)의 몫과 비교하라는, 그리고 삶의 가치를 겉으로 드러나는 부에 의해 측정하라는 권유와 유혹과 설득, 더 나아가 강제를 받게 된다. 이와 동시에 만족스러운 삶의 현실적 전망은 급격히 분산되지만 , 사람들이 꿈꾸고 갈망하는 '행복한 삶'의 기준과 증표는 수렴되는 경향을 띤다. 사람들이 행동하는 원동력은 이제 '옆 사람을 따라잡는다'라는 어느 정도의 현실적 욕구가 아니라 '유명 인사를 따라잡는다.' 즉 슈퍼모델, 프리미어리그 축구 선수, 상위 10대 가수를 따라잡는다는 지독하게 허구적인 생각이다. 올리버 제임스의 말대로, 이런 유해한 심리는 "비현실적인 열망, 그리고 그것이 충족될 수 있다는 기대"를 조장한 탓에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수의 영국인은 자신이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으며","1970년대 이후 실현 가능성이 줄어들었음에도 누구든 앨런 슈거나 빌 게이츠가 될 수 있다고 믿고"있다.
오늘날의 국가가 국민에게 실존적 안전("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즉 루스벨트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는 '굳건한 신념'을 피력하며 사용한 문구)을 약속할 수 잇는 가능성과 의지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부수적 피해/지그문트 바우먼/정일준 옮김/2011/민음사